'할 수 없다'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
우리는 심심찮게 '할 수 없다' 내지는 '할 수 없어'를 아주 쉽게 입 밖으로 내뱉곤 한다. 문득 이 '할 수 없다'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됐다. '할 수 없다'란 말에 도대체 어떤 뜻이 품어져 있는 것인지, 인간은 왜 '할 수 없다'를 그리 쉽게 내뱉는지 하나둘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할 수 없다'는 미래의 어떤 것에 대한 현재의 내 마음과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반대로 과거의 어떤 것에 대한 나의 상태는 '못해'로 표현한다. 해봤는데 못하는 것도 아닌, 해 보지도 않았는데 할 수 없다고 하는 '할 수 없다'는 미래에 대한 항복이며, 굴복이며, 말 그대로 포기 선언과도 같다.
그 말에는 내가 그것을 '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나에게 열릴 수 있는 미래의 소멸이 담겨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하지 않은 나도 하나의 미래로 나타나겠지만, 그 미래는 나를 지레 겁먹게 하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한 그것을 '했을 때'의 미래보다 낫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나를 위해서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가능성에 대한 백기 투항과도 같아서, 내게 다가올 무엇을 부정적인 무엇으로 단정해 미지의 것으로부터의 회피를 감행하게 한다. 이는 곧 도전 정신과 용기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 자체로 대단히 존재자의 숙명과 책무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
시간의 영향을 받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자이기에, '할 수 없다'란 미래에의 차단 선언은 존재자의 본질을 거스르는 대단히 비본래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 수 없다'란 존재해선 안 된다. 우리는 '할 수 없다' 대신 적어도 '해 봤는데'라는 어구를 붙여야 한다. 그래야만 오로지 '할 수 없다'라는 굴복이 그나마 정당화될 수 있다.
인간은 '할 수 없'지 않다.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일 뿐이다. '할 수 없다'는 흘러가는 시간 아래에 끝없이 나아가는 인간 존재의 근본을 부정하는 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일갈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의 '할 수 없음'을 존재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Just Do it'이 괜히 오랫동안 유익한 말로써 쓰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해!'라는 말이 단순히 무책임하고 모든 사정을 무시하는 말로써 들리지 않고, 일단 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발생됨의 예견으로 다가오는 것도 '할 수 없다'의 미사용 권고랑 궤를 같이 한다고 본다.
해 보지도 않고 할 수 없다고 하지 마!
할 수 없음의 선언으로부터 얻은 무의 상태보다, 일단 해보고 난 다음 얻은 결과가 그것이 상처가 되었든, 성취가 되었든 더욱 당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고, 존재자의 존재론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마땅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