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킬레비치 『죽음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먼』
우리는 죽음은 나와는 어떤 식으로도 상관이 없다고 스리슬쩍 결론 내립니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자,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철학하려고 시도하는 자, 바로 그자가 보편적인 사멸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합니다. 그는 '마치' 죽음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이 하면서, 곧바로 "마치"라는 규약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결론"은 오히려 열렬한 희망과 경솔함과 자기기만의 오류 추리이며, 죽음의 날짜가 불확정이라는 데에서 터무니없는 용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사멸의 법칙은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지만, 나만은 제외... 하지만 깊이 들어가지 말자! 아니, 너무 열심히 생각하지 말자. 이런 것이죠.
장 그르니에의 스승이라고 하는 장킬레비치. 『존재의 불행』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 책이 언급된 것을 보고 구매했다. 제목도 당차게 '죽음'인 만큼 죽음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유가 다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읽어나가면서 느낀 아이러니하면서도 역설적인 점은, 죽음을 수천 번 이상 언급하며 그 비밀과 신비를 파헤치는 이 책에서 알 수 없는 묘한 생명력이 샘솟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와 고찰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이 책은 그야말로 죽음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그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지 명확하고 명쾌하게 일갈한다. 결국 죽음은 철저히 존재의 무(無)화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수 있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음으로써 그 어떤 사유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모순적 상호성 아래, 죽음은 인간에게 유일한 무엇이다.
시작이 탄생이라면 그 끝은 죽음일지언데, 우리에게 탄생 이전은 없으며, 반대로 죽음 이후는 없다. 그런 면에서 탄생과 죽음은 모순적 상호성의 관계에 있다. 이런 차이가 있는 반면에, 탄생과 죽음 둘 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절대적 숙명 내지는 운명이라는 것에는 큰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죽다 살아난 극한의 상황조차도 결국 죽지 않음의 연속일 뿐, 죽음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무가 돼버리고 말 존재에 그쳐, 그 탄생과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철학하고 탐구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저자는 말한다. 죽음은 존재를 무화시키지만, 그 존재의 '있었음'을 되려 증명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웃기지 않은가! 우리는 죽을지언정, 우리가 살았다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로 남겨진다. 죽음은 우리의 육체를 시체로 만들지만, 그 죽음조차도 있었던 것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의 종말처럼 지금도 모두를 엄습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녀석이, 마침내 인간의 사냥을 성공해 그 존재를 물질적으로 무로 만들더라도, 그 존재의 태어난 후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무언가는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을 빌려, 이렇게 죽음을 끝없이 파헤친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삶을 무한히 긍정하는 낙관주의가 되는 것이다. 결코 죽어 사라지고 말 우리 삶은 '있었던 것'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일반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해서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주변인을 떠올려보자. 죽음이 그들의 육체는 거두어갔을지언정, 그들과 함께한 우리의 추억은 살아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그들의 '있었음'이다. 그들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들의 존재함은 우리 안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어차피 죽으니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우리는 죽어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 채로 떠나는 거다. 생전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남을 스스로의 모습과 삶이 찬란하게 빛나길 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죽음을 긍정하고 비록 죽어서 나는 없어지겠지만, 남겨질 훌륭하고 아름다운 내 모습을 위해 매 순간 현생을 더 낫게 만드는 것. 죽음 앞에 취할 수 있는 나의 태도는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