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길 『무한을 향한 열정』
우리는 유한한 세상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까 무한은 유한의 피안에 유한으로부터 아스라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마냥 생각하기 쉽다. 어떻게 무한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나 유한과 무한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사유규정이므로 유한이 없으면 무한도 없고 거꾸로 무한이 없으면 유한도 없다. 다시 말해 유한이 있으면 무한이 있고 무한이 있으면 유한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무한의 문제는 우리가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정신 세계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유한과 무한이 뒤섞인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2천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개념 거부 이후 19세기 헤겔과 칸토아에 의해 되살아난 무한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사멸되지 않고 현존하는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삶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문득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 앞에 철저히 유한한, 필멸하고야 말 존재자가 떠오르곤 한다.
무한이 실재하는지,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우리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나는 개념은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은 존재자의 임의적 행위에 의해 그 개념의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무한이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니 안 되니 하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이라는 개념은 내가 삶을 골몰하게 하는 하나의 매개로써 그 정당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의 입장에서, 유한과 무한이란 결국 끝없이 흐를 시간이라는 녀석을 붙잡아 특정 짓는 명명에 불과하다. 나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고, 나 이외의 것들의 시작과 끝이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무엇을 발견한다.
나는 삶이 유한하다는 그 불가피의 사멸, 즉 죽음 앞에서 끝없이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명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그 끝이 허탈하지 않을 수 있게, 더 나아가 그 과정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또, 나는 나 이외의 세상은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내가 없이 진행될 세계 앞에서, 죽음마저도 무화 시킬 수 없는 나의 있었음을 아름답게 남기려 한다.
지구가 멸망해서 세상은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 마라. 결국은 우주가 소멸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마라. 나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무한이 실재하지 않아도 된다. 무한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무한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게만 하면 된다. 나에게 결국 무한은 시간의 영역 내에서 사유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내 삶에 한 줌의 빛을 더 쬐여줄 그런 것인 셈이다.
내게 무한을 향한 열정 따위는 없다. 하지만, 무한을 통한 열정은 있다. 나의 삶이 유한함에 그 소중함을 발견하고, 세상의 무한함에도 남겨질 나의 있었음에 삶의 소중함을 또 발견한다. 유한하든 무한하든 삶이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유한과 무한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