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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호랭이 Jan 06. 2024

[서평] 터무니없는 것은 믿음 앞에서 그렇지 않게 된다

최진영 『구의 증명』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영등포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매대를 둘러보다가,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라는 후면의 글을 보고 미묘한 끌림을 느껴 읽게 된 책이다. 현대의 금기 중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식인 행위를 사랑과 연관 짓는 것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같은 책들이 큰 흥행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미노 요루의 그 책은 사랑하는 사람에의 표현으로써 저런 참신한 발상을 한 것이고 최진영의 이 책은 극 중 인물이 실제로 식인 행위를 한다는 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 사랑하는 이의 죽은 몸을 먹는다는 식인 행위는 이 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크나큰 사랑을 가진 사람의 보편적 관점에서의 비윤리적, 개인적 관점에서는 애틋한 추모 방식일 뿐이다. 사랑하는 자를 먹음으로써 그의 비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면, 남겨진 자에게 그것은 온전히 스스로에게 옳은 방법인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 윤리가 끼어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존재는 죽음으로써 무화되고, 무화와 동시에 그의 있었음이 그가/그를 사랑했던 자들에게 남는다. 우리가 이제는 죽어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들의 있었음을 간직하는 것처럼, 주인공 '담'은 죽어 없는 '구'를 추억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목적으로 그를 먹는 것이다. '구'는 먹힘으로써 그의 있었음을 사랑하는 자에게 남길 수 있게 됐고, '담'은 먹음으로써 그의 있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담의 이런 긍정 방식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잘 떠올려보자.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무엇인가? 한 단어로 '터무니없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고야 말 운명이자 숙명이며, 우리는 그 앞에서 철저히 무력해질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현존재들은 그런 암울한 숙명 속에서도 꿋꿋이 그들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바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이 마법처럼 터무니없는 것을 터무니없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담은 구의 시체를 먹으면 그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믿음으로써 그녀에게 터무니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구의 죽음을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비윤리니 비도덕이니 하는 것은 나의 내면 이외의 관점이기에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 『구의 증명』은 필멸해버릴 현존재와 역시 필멸해버릴 공동현존재의 죽음을 긍정하는 극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담의 식인을 통해 그의 행위에의 괴랄함보다는 그 행위를 있게 한 그녀의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그 의지를 보았고, 아마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그녀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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