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벤 슈틸리히, 『존재의 박물관』
우리에게서 무언가는 틀림없이 남는다. 다만 그게 무엇일지 우리는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뿐이다. 인생이 우리를 기억하리라. 찾아갔던 곳, 만났던 사람, 우리가 살았던 세상을.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생은 계획할 수 없는 것, 카오스이자 생동감이 넘치는 흥미로운 것이다. (15p)
모든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우리가 지나온 길 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비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간과 장소에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로 우리에게 흔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태어난 직후 지금까지 걸어온 일생은, 그리고 마침내 끝나버릴 인생은 우리 존재의 흔적이 모인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전달하는 '존재는 흔적의 집합체'라는 메시지를 '그러므로 모든 순간은 소중하다'라는 (나에게는) 진부한 교훈으로 정리하기는 무언가 좀 아쉽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과거의 모든 순간의 결과물이고, 우리의 미래 모습은 그런 지금(이자 과거)의 결과물일 것임은 이 책의 메시지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내릴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흔적의 집합체'라는 메시지를 더 진전시켜 보자. 완성되고 있는 박물관 혹은 완성된 존재의 박물관은 그 존재가 마침내 무화된 순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존재가 사라졌으니 존재의 박물관도 사라지는가? 존재에게 박물관을 완성해갈 망치를 쥐여준 것은 바로 '흔적'이다. 내 존재의 흔적은 이미 지나쳐 온 이상 그 순간부터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본질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 말은 즉, 내가 죽어서 무화한다고 해서 내 존재의 흔적도 같이 무화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 나라는 존재자는 사라지더라도, 내 존재의 흔적과 박물관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 사라질 수도 있다. 이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의 박물관의 유무는 그렇다면 어떤 요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남겨진 자들이다. 나라는 존재자는 사라지지만 나라는 존재는 남겨진 자들에 의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각자가 가진 수십억의 우주 아래에서 내 존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겨진 자들이 바로 내 존재의 박물관의 소중한 방문객이자, 수호자이자, 후원자인 것이다. 내 일생이 아름답고 찬란해야 그들 역시 내 박물관에 애정을 계속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내 존재의 박물관에 그들이 계속 방문해 주었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내 일생을 찬란한 무엇으로 만들어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으며, 내 존재의 모든 흔적이 될 '모든 지금'을 사랑하고자 한다.
나 역시 사랑하는 이들의 박물관의 관객이자, 후원자이자, 수호자이고 싶다. 내가 그들의 일생을 응원하고 믿는 것의 기저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