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세계를 갖는 방식
사실(事實).
일 사(事), 열매 실(實).
일어난 사건이 실제로 맺힌 것.
이미 발생해 채워진 상태.
사실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내가 보았는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내가 이해했는지와 상관없이 이미 그러하다.
비가 내렸다는 것,
누군가 떠났다는 것,
어떤 말이 발화되었다는 것.
사실은 의미 이전의 상태다.
그저 발생했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직 해석도,
판단도,
나의 태도도 없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현실이다.
현실(現實).
나타날 현(現), 열매 실(實).
지금 눈앞에 드러난 실제.
현실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사실이 나를 통과할 때,
그 사실은 나의 현실이 된다.
같은 말 앞에서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같은 이별 앞에서도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단단해진다.
사실은 하나지만,
현실은 각자 다르다.
현실은
사실과 존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세계다.
그곳에는 이미
나의 기억과 기대,
두려움과 해석이 스며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眞實).
참 진(眞), 열매 실(實).
가려진 것이 벗겨져 드러난 실제.
진실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발견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같은 현실 속에서도
어떤 존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어떤 존재는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무엇을 발견한다.
진실은 사실처럼 무심히 발생하지 않는다.
현실처럼 제각각 흩어지지도 않는다.
진실은
내가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진실은
발견되는 순간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나로부터 응답된 현실이
진실이 된다.
그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감당할 것인가,
피해갈 것인가.
받아들이든,
외면하든,
그 태도는 곧
나를 형성한다.
내가 현실 앞에서 취하는 태도,
그 즉시 진실이 된 현실이
나를 규정해간다.
그래서 진실은
내가 통과한 참이다.
내가 마주한 진실들은
지금의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나는 스스로가 응답한 만큼의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현실들 가운데
또 다른 진실들이 드러날 때,
그만큼 나의 세계는 넓어질 것이다.
사실은 발생하고,
현실은 나타나며,
진실은 드러난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알 수 없고,
모든 현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모든 참에 도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진실만큼은
내 삶의 형식이 된다.
존재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는가에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진실을
자기 삶으로 통과시켰는가에 있다.
나는 사실 속에 놓여 있고,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진실 앞에서 나를 드러낸다.
그것이
내가 세계를 통과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세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