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우리는 기분을 감정이라 부르고, 감정을 정서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 세 개념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놓인 결은 분명히 다르다.
기분(氣分).
기운 기(氣), 나눌 분(分). 기운이 나뉘어 퍼진 상태.
기분은 대상 없이 일어난다.
까닭 모를 무거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가벼움.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세상이 선명하고,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모든 것이 흐릿하다.
기분은 내가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어난다.
존재의 표면에 방향 없이 떠오르는 기운.
기분은 통제의 영역 바깥에 있다.
감정(感情).
느낄 감(感), 뜻·마음 정(情). 외부에 닿아 마음이 움직인 것.
감정은 기분과 다르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를 향한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어떤 상황에 대한 분노, 특정한 선택 앞에서의 두려움.
감정은 반드시 대상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기분이 대상을 향해 방향을 형성하는 순간이다.
존재의 표면에 떠오른 기운이
세계의 무언가와 닿으며 특정한 형태로 뿜어져나온 것.
그러나 감정에는 기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감정은 세계에 의해 촉발되지만,
내가 부여한 의미에서 완성된다.
기분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만,
감정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흘려보낸다.
같은 상황 앞에서도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담담하다.
감정은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내 것이다.
감정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감정의 방향은 오직 나만이 정할 수 있다.
정서(情緖).
뜻·마음 정(情), 실마리 서(緖). 마음의 실마리들이 얽혀 이루어진 것.
감정의 情과 정서의 情이 같은 글자다.
정서는 감정(情)의 실마리들(緖)이 얽혀 형성된 것이다.
정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서는 향하지도 않는다.
정서는 쌓인다.
내가 감정을 다뤄온 방식,
부정적 감정을 감당하거나 외면해온 역사,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을 밀어냈는가.
그 응답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지층을 이룬다.
그것이 정서다.
정서는 타고난 기질처럼 느껴진다.
마치 바꿀 수 없는 무언가처럼.
정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내가 감정을 통과해온 방식의 결과다.
기분은 일어나고,
감정은 향하며,
정서는 형성된다.
존재는 기분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감정 앞에서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체적 응답이 쌓여
정서라는 존재의 내면적 형식을 이룬다.
정서는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감정을 살아낸 방식의 형식이다.
존재는 기분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감정으로 세계와 관계 맺으며,
정서로 자신의 내면을 구성한다.
그렇게 존재는 세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