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이기만 한 것
긍정주의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현실에 눈을 감고, 불행조차 자신의 긍정성 부족 때문이라 생각하고, 오직 스스로의 책임을 비난하라'라고 다그치는 암묵적인 권위가 되어 버린다.
난 감상을 줄줄이 이어나가기 위해서 이 책의 명확한 한계를 집고 넘어가야만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긍정에의 시선'으로부터 내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의 논리 전개 방식에 큰 주안점을 두고 읽었고, 약간의 불편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불편한 점은 '긍정이 좋은 게 아니다'라고 결과를 정해놓고 사례를 대입해 논리를 전개시켜나간 '답정너'식 글 때문이었고, 안도감을 느낀 건 그런 식으로의 글만이 '긍정'을 좋지 않은 것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편법 없이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느낌이랄까.
예견된 불편함 앞에서도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나를 조금이라도 깨부수고 말랑말랑해지고 싶어서다. 어쩌면 내 정체성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긍정성에 '긍정의 배신'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도전장을 내민 이 책 앞에서 나는 도망치기를 원치 않았다. 직접 대면해서, 나의 긍정성에 허점들이 있었다면 더 견고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의아했던 점은, 긍정이라는 것은 분명히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영역들인데, 이것을 좋고 나쁘다는 가치 판단의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내가 긍정을 좋다고 생각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행복해지는 내가 좋아서 긍정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말하는 긍정적 사고와 약간의 차이가 생기는 듯한데, 나는 긍정적이기만 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긍정적 사고의 앞뒤에는 분명히 어떠한 행위들과 결심들이 즐비해 있다.
어떤 것을 했기에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를 통해 경험의 값짐을 깨달으며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한 뒤에 분명히 어떠한 책임이 따르는 결심을 하고, 그 결심으로부터 성장할 내 모습에 행복해하는 것이다. 난 결코 '긍정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대책 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사람을 향한 비판이겠지만, 그런 사람을 향한 비판은 긍정의 영역보다는 계획과 실행의 영역에서의 비판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절체절명의 미국의 시대 상황을 이야기하며 긍정을 역설하지만, 난 그 당시에 파산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긍정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먼 역시 긍정 때문에 파산했다기보다는, 계획적이지 못하고 '좋은 소리'만을 듣고 싶어 한 고집 때문이다. 이게 과연 긍정의 영역에서의 문제였을까? 사탕 발린 말을 좋아하는 게 과연 긍정적 사고와 연관이 있을까? 천만에.
인간의 사고 측면에서, 그것들은 온전히 이유가 되진 않는다. '긍정적이어서 망했다', '부정적이어서 망했다'와 같은 말들은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는 것과 같다. 난 그것들이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긍정적이면 성공하고 부정적이면 망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타인의 긍정과 부정을 내가 판단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 그냥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사고와의 관계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감정과 행동일 뿐이지. 거기에 타자성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영향을 받을 순 있을지언정, 타인의 판단에 의해 주입되어서는 안 된다.
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너무 좋아서 긍정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긍정의 사고가 나의 행복을 보전시켜주니까 긍정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긍정 하나 때문에 내 삶이 행복한 건 아니다. 긍정이 있는 내 삶이 행복한 거지.
긍정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역시 내 외연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 불편하고 거슬리는 독서 역시 나에겐 값진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다. 긍정을 비판하는 '긍정의 배신'을 읽은 경험조차도 나에겐 긍정적이다. 어쨌든 말랑말랑해지는 데 일조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