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서 떠오르려는 언어,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단어 하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언어가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닌 언어는 획득된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언어를 버리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혀끝에 무슨 언어든 떠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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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어 그 자체를 다루는 책을 몇 권 읽어나가면서 강해진 하나의 믿음이 있다. '한 개인의 언어는 그 사람의 세계이며, 분명한 한계다.' 그런데,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읽고 굳게 믿어 왔던 하나의 명제에 균열이 생겼다. 우리는 말하지 못하는 어떠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바로 그 순간. 떠오르지 않는 그 미지의 단어가 바로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인 것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 구사하고 사고할 수 있는 언어의 영역이 그 사람의 한계임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이 비정형의 형태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언어는 인간을 뛰어넘지 못한다. 인간은 언어라는 하나의 개념 체계로 정의될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 언어에게 주체성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사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이 넓은 것과 내 삶과 그 주체성은 상호 연관이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우뚝 서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비교적 수월한 '언어에 감각이 있는 나'를 전면에 내세워 스스로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에 친숙하고 능숙한 것이 내 정체성 중의 일부인 것이지, 그것이 내 전부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최근에 나에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순간이 많이 찾아왔던 것 같다. 철학적 사유가 가득 담긴 책들을 읽으며, 서평을 쓰고 있는 순간들마다 나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순간을 항상 마주하고 있었다. 느낀 건 명확히 머릿속에 흐물거리고 있는데,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배출되지 못하는 그런.
언어에게 정복당하지 않는 아름답고 강인한 인간의 모습. 혀끝에서 맴돌아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는 그런 이름들. 혀끝에서 맴돌다 비로소 튀어나오는 순간의 이름과 다시 삼켜지는 이름.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언어적 태고에 맞닿아 있다.
그렇게 나에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뱉어지지 못했지만, 비로소 모든 것을 글로 풀어내며 혀끝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