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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May 14. 2017

데자와

 나의 브런치 필명은 데자와이다. 그 유명한 캔 밀크티에서 따온 것이 맞다. 도서관 앞 자판기의 600원짜리 데자와, 제 1 학관의 700원짜리 데자와, 그 두개가 모두 동났을 때는 할 수 없이 학관 편의점의 900원짜리 데자와. 안 마시려고 해도 일주일에 두 잔 정도는 꾸준히 데자와를 마시는 것 같다. 그렇게 데자와를 달고 산 덕에 주변 사람들은 데자와를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동아리방에 데자와 캔을 버려두고 나왔는데, 나보고 다녀갔냐며 누군가 연락을 해 온 적도 있고,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누군가 데자와 예찬을 해 놓으면, 댓글로 나를 태그하기도 한다. 데자와가 나를 상징하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데자와 홀릭을 넘어 데자와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지만, 정작 데자와를 처음 입에 댄 스물 한 살 전까지는 데자와는 커녕 밀크티조차 입에 대 본 적이 없다. 커피는 확실히 즐겨 마시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기호식품이랄 것이 없었다. 별다른 취미도 없는 재미없는 나날들. 그런 이유로, 고등학교때까지의 삶의 색깔은 무채색이라고 칭할 수 있다. 또래들이 듣지 않는 특이한 음악 - 트래비스, 오아시스, 서틴 센시즈 등 - 을 듣고, 지금처럼 담담한 투의 글을 쓰기는 했지만, 뭔가 색깔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조금 우중충했을 뿐이다. 그냥 하루하루 모의고사 점수가 - 언어와 외국어 영역 한정이지만 - 잘 나오는 것이 즐거워서 그 맛에 학교를 다니는 일상의 반복이었던, 지극히 평범한,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특이할 정도로 색깔이 없었던 고등학생의 삶이었다. 그렇게 색깔 한 티끌도 없던 삶이, 대학교에서 밴드 동아리를 들어가며 달라질 기회를 잡게 되었다.


 동아리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앞다투어 내게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은 영국인이라는 별명이었다. 주로 영국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내 목소리가 그런 노래들에 잘 어울린다며 나를 영국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흔한 별명들은 긍정적인 것이 별로 없기 마련이다. 주로 놀리려는 목적으로 우스꽝스러운 점을 잡아 별명으로 만들곤 하는데, 이번에 받은 별명은 꽤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음악을 편식하는 나를 비꼬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 특징을 부각시키는 별명 같아서 좋았다.

 본가를 떠나 자취를 하게 되면서, 예전처럼 커피를 마음껏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에는 보온병에 모닝 커피를 담아들고 집을 나서거나, 아니면 집에서 나설 때마다 받는 용돈으로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 마시거나 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마시기는 너무 귀찮았고, 한 달에 30만원인 용돈으로 한 잔에 2000원이 넘는 커피를 마시기는 빠듯했다. 자연스럽게 저렴한 자판기 음료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익숙한 음료들이 많았다. 코카콜라, 데미소다, 코코팜, 흔히 볼 수 있는 캔커피들. 그런데 처음 보는 음료 역시 있었다. 데자와가 바로 그것이었다. 500원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 500원을 굴려 넣고 데자와를 손에 쥐었다. 약간 진한 베이지색을 하고 있는 캔을 따고, 한 모금을 마셔봤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는 것이었다. 대충 한 캔을 털어넣었다. 솔직히 말해,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괜히 친구들과 자판기 앞에 설 때면, 데자와를 뽑아 마시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상한 맛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는 그런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동아리 친구 중 하나가 나를 보면서 박장대소했다. 영국인이 홍차를 마시고 있다고, 정말 웃기긴 한데 너답다고,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데자와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학교의 자판기에서 데자와가 500원 하던 시절, 자판기에서 데자와가 빠지고 학관 편의점에서만 팔던 시절을 지나, 다시 자판기에 입성하기까지. 5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가 사랑하는 데자와에게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나는 변함없이 데자와를 즐겨 마신다. 일단은 맛이 있다. 밀크티 중에서는 과일의 향과 맛이 강한 것이 있는데, 나는 그런 밀크티는 별로다. 데자와처럼 우유 맛이 강한 밀크티가 내 취향에 더 맞다. 캔의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요새는 디자인이 약간 달라져서 붉은 빛이 들어갔는데, 예전의 하얀색이 섞여있던 디자인이 내 취향에 맞긴 하지만, 어쨌든 디자인의 핵심은 진한 베이지색 배경이다. 그 색깔이 좋아서 기타를 체리나 썬버스트가 아닌 내츄럴으로 사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음료의 캔 색깔이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된 것이다. 데자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 역시 내가 데자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밀크티라는 특이한 포지션의 음료. 베이지색 캔. 미세한 홍차 맛과 강한 우유 맛. 이런 것들이,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음악,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성격과 어울리는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음료가, 신기하게도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정말로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검정 혹은 하얀색이었다. 이제는 당연하게도 베이지색을 꼽는다. 위에서 말했듯, 기타의 색 역시 데자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흔하지 않은 내츄럴 컬러를, 별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다. 어떤 카페에 단골이 되면, 밀크티를 시켜서 마셔보곤 한다. 밀크티라는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마실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늘어난 셈이다. 그리고, 필명 역시 별 고민하지 않고 데자와로 정하게 되었다. 브런치 전에도 많은 SNS나 블로그를 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필명을 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대충 아무거나 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또 너무 진지해보이는것을 하고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런치를 시작할때는 몇 초 고민하지도 않고 필명을 데자와로 정했다. 내가 쓰는 글의 이미지와 데자와라는 음료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데자와를 좋아하게 된 것 뿐이었는데, 이제는 데자와 한 캔에 고단했던 하루를 날려버릴수 있게 되었다. 그에 더해, 데자와는 무채색이었던 내 삶에 색을 더해주기까지 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음료수도 확실히 고를 수 있고, 어떤 물건을 살 때 가지고 싶은 색깔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의 구석구석이 데자와를 닮아가고 있다.


데자와가 매진인 날은 살짝 우울하다


나의 에피폰 카지노 데자와 에디션


마시지 않던 밀크티도 종종 마신다


역시 제일 좋은건 데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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