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piphone Casino
새 기타를 한 대 샀다. Epiphone ES-335 PRO. 인생에 세 번째로 찾아온 일렉 기타이다. 이 기타에 대해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키보드 앞에 앉았는데, 자연스럽게 이 기타 전에 썼던 기타 두 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쓰다 보니, 기타 한 대당 한 편의 글을 써도 될 정도로 길어졌다. 오늘은 첫 번째 일렉 기타인 에피폰 카지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20대 초반, 대학교 동아리에서 밴드 활동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보컬이었기 때문에 따로 악기를 연주하지는 않았다. 무대에서는 노래만 했다. 무대에서 기타를 치는 일이 없으니 굳이 돈을 들여 좋은 기타를 쓸 이유가 없었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 관심 자체가 없었고, 딱히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밴드 동아리에서 흔히 있는, 누가 새 기타를 사면 동아리방에 모여서 새 기타를 구경하는 그 순간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는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친구가 새 물건을 사서 관심을 가지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때 기타에 대해 좀 알았더라면 다양한 기타를 만져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는 심심찮게 든다. 아쉬운 일이다.
기타라고는 그냥 코드를 긁으며 노래하는 것 정도의 의미만 있어서, 데임, 세고비아 같은 브랜드의 10만 원짜리 통기타면 충분했다. 그런데 내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출처 없는 무한한 자신감을 얻게 된 전역 직후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번 음악을 제대로 해보자고 생각했고, 그 시작으로 괜찮은 기타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일렉 기타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여서, 어떤 기타를 살지 정하기 힘들었다. 막연히 원했던 것은 통기타로 쳐야 하는 파트를 연주해도 위화감이 크게 없는 일렉트릭 기타였다. 알고 있는 곡들은 10만 원짜리 통기타로 치기 적절한 곡들이었고, 앞으로 치고 싶은 곡들도 대부분 백킹 파트거나, 아르페지오 곡들로, 어쿠스틱한 사운드가 어울렸다. 기타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 원하는 점을 알려주며 조언을 구했다. 친구들은 일단은 외관이 맘에 드는 기타를 사라고 했다. 예뻐야 눈이 자주 가고, 그러면 손이 자주 가고, 그래서 정이 든다고 했다. 어쿠스틱한 연주도 가능한 일렉 기타라면 할로 바디가 괜찮다고 했다. 속이 꽉 찬 나무로 된 대부분의 일렉 기타와는 다르게, 할로 바디 기타는 속이 비어 있는 일렉 기타라고 했다. 마침 할로 바디 기타는 외관도 예뻤다. 그래서 할로 바디 기타를 사기로 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어떤 할로 바디 기타를 살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살 만한 가격이면서 괜찮은 할로 바디 기타를 만드는 브랜드 중 에피폰이 있었다. 어쩌면 에피폰을 좋아하기 시작한 게 그쯤인 것 같다. 펜더의 자회사인 스콰이어가 주는 느낌과 깁슨의 자회사인 에피폰이 주는 느낌은 조금 다르다. 깁슨 모델의 보급형 버전을 생산하기는 하지만, 나름 에피폰의 색깔이 있었고, 역사적인 고유 라인업도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에피폰의 유명한 할로 바디는 닷, 쉐라톤 정도가 있었다. 와일드캣, 센츄리 같은 다른 많은 다른 모델들도 있었는데, 당시 지인들이 이상한 모델을 사지 말라는 알 수 없는 이유를 들며 사지 말라고 해서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다. 그렇게 뮬 중고장터에 잠복하며 적당한 에피폰 할로 바디 기타를 물색하던 중, 카지노라는 기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모델들에는 "이상한 기타"라고 하며 회의적이던 지인들이, 카지노에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지인은 카지노가 왜 괜찮은 기타인지 읊기 시작했다. 세미 할로인 닷이나 쉐라톤, es-335와는 다르게 풀 할로 바디여서 소리는 물론 존재 자체도 개성 있고, 깁슨의 카피 모델이 아니라 에피폰 고유의 모델이라는 역사도 있고, 존 레논의 기타 이기도하고, 그렇게 열렬히 설명하다가,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곡의 뮤직 비디오에도 나오는 기타 같다고 했다. 뮤비를 틀어보았는데 3초쯤 지나니 기타리스트의 손에 들려 있는 에피폰 카지노가 보였다. 바로 중고 판매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카지노를 사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피폰 카지노는 인생 첫 일렉트릭 기타가 되었다. 색깔은 내츄럴로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존 레논의 카지노가 내츄럴 피니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구입했다. 좋아하는 곡의 뮤비에 나온 것과 같은 색깔이고, 좋아하는 데자와의 색깔과 같아서 마음이 갔을 뿐이다. 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았던 셈이다. 카지노는 범용성과는 거리가 먼,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한 기타지만, 딱히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로 연주하는 노래들이 클린 톤을 가진 것들 뿐이었기 때문에 별 불만 없이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 기타를 거의 치지 않았기에 불만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 앰프가 없었고, 오디오 인터페이스는 다룰 줄 몰랐다. 그 기타를 가지고 있었던 의의, 좋아했던 이유, 그건 결국 기타의 소리나 성향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생긴 게 맘에 들어서, 그리고 좋아하는 뮤지션이 써서 같은 이유였다. 악기라는 기타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이유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 기타를 악기로 대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카지노의 브릿지 구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타 바디 앞면의 맨 아래쪽에서 기타 줄을 잡아주는 브릿지는, 기타 줄을 갈아줄 때 필수로 손을 대야만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브릿지의 구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줄을 몇 번 안 갈아줬다는 것, 어쩌면 한 번도 갈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주하는 악기보다는, 방의 인테리어 정도로 대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타를 가지고 있던 동안, 그리고 팔고 나서도 한동안은 카지노를 소홀하게 대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새 기타를 사고, 제대로 관리를 해주고, 정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에피폰 카지노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기타에 애정을 가지려면 먼저 기타를 관리하는 법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묵은 때를 닦아내고, 헐거워진 나사는 조여주고, 지판에 레몬 오일로 영양을 주고, 폴리시로 바디를 반짝반짝하게 닦아주고, 낡은 줄을 교체하고, 손에 맞게 줄의 장력을 조절하고,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서 기타를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 놓으면, 그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 지고, 기타를 악기로 대하는 순간이 늘어나게 되고, 그 기타를 좋아하게 되고, 그런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에피폰 카지노는 내게 그런 애정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다른 기타에게 애정을 주는 법은 가르쳐준 셈이 되었다. 나중에 기타를 더 잘 치게 되고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에피폰 카지노를 한 대 사서 이 기타가 어떤 소리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 물론 이 기타가 준 깨달음을 그대로 간수한 채, 관리도 더 잘 해 줄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