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리밀 Oct 11. 2016

이번 여름은
반바지를 많이 입지 못했다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하여

 반바지를 입기 시작한건 군대 동기의 권유 때문이었다. 옷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는데, 사회에 있을때의 내 사진을 보고 "형의 패션은 정말 절망적이야."같은 말을 하곤 했다. 티셔츠나 후드를 자주 입고, 바지는 사시사철 청바지를 입고 다녔었다. 청바지는 너무 노동자같다면서, 반바지를 하나 사 입으라고 했었다. 전역하고 베이지색 반바지를 하나 샀다. 신세계였다. 어떤 옷에 맞춰 입어도 잘 어울린다거나 하는 좋은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시원한게 맘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전역한 그 여름 한참 입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다가오는 가을 때문에 영원히 반바지만 입고 다닐 순 없었다. 빨리 반바지를 입는 계절이 왔으면 좋겠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장롱 한 구석에 반바지를 접어 넣었다.


 추운 시절은 꽤 빠르게 물러갔고, 또다시 더위가 완연해졌다. 장롱에서 반바지를 꺼냈다. 문제가 생겼다. 전공이 화학인지라 실험 수업이 있는데, 그 날은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시약 등의 위험성 때문에 짧은 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며칠은 반바지를 입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꾹꾹 눌러담은 채, 학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는 방학 중에는 맘껏 반바지를 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기가 끝나고 바로 아르바이트에 들어갔다. 학교의 입학 부서 일을 했는데, 남자 직원 중 아무도 반바지를 입은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나도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중 5일은 반바지를 입지 못하게 되었다. 주말에는 주중 쌓인 피로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반바지와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찾아온 개강. 저번 학기보다 더 많아진 실험 수업에, 반바지를 입을 수 있는 날은 더욱 더 줄어갔다. 그리고 지금, 이틀 전의 여름은 온데간데없이 한 순간에 초겨울이 찾아오고 말았다. 반바지를 입을 수 없는 날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주가 앞으로의 나날들보다는 그래도 덜 추울 것이라는 생각에, 덜덜 떨며 반바지를 입었다.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하고자 했던 것을 하기 위해서.


 반바지를 입을 때를 놓쳐버린 내 모습이 글을 쓰려 하지만 자꾸 완성하지 못하는 요즈음의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바지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입지 못하는 시기가 온 내 모습은, 마치 바쁜 일상 아래서 구상만 하고 글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과 꼭 닮아있는 것 같다. 추위를 무릅쓰고 반바지를 입고 나간 내 모습처럼, 무언가 행동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짧은 글을 완성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와 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