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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반바지를 많이 입지 못했다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하여

by 이이육

반바지를 입기 시작한건 군대 동기의 권유 때문이었다. 옷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는데, 사회에 있을때의 내 사진을 보고 "형의 패션은 정말 절망적이야."같은 말을 하곤 했다. 티셔츠나 후드를 자주 입고, 바지는 사시사철 청바지를 입고 다녔었다. 청바지는 너무 노동자같다면서, 반바지를 하나 사 입으라고 했었다. 전역하고 베이지색 반바지를 하나 샀다. 신세계였다. 어떤 옷에 맞춰 입어도 잘 어울린다거나 하는 좋은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시원한게 맘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전역한 그 여름 한참 입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다가오는 가을 때문에 영원히 반바지만 입고 다닐 순 없었다. 빨리 반바지를 입는 계절이 왔으면 좋겠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장롱 한 구석에 반바지를 접어 넣었다.


추운 시절은 꽤 빠르게 물러갔고, 또다시 더위가 완연해졌다. 장롱에서 반바지를 꺼냈다. 문제가 생겼다. 전공이 화학인지라 실험 수업이 있는데, 그 날은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시약 등의 위험성 때문에 짧은 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며칠은 반바지를 입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꾹꾹 눌러담은 채, 학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는 방학 중에는 맘껏 반바지를 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기가 끝나고 바로 아르바이트에 들어갔다. 학교의 입학 부서 일을 했는데, 남자 직원 중 아무도 반바지를 입은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나도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중 5일은 반바지를 입지 못하게 되었다. 주말에는 주중 쌓인 피로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반바지와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찾아온 개강. 저번 학기보다 더 많아진 실험 수업에, 반바지를 입을 수 있는 날은 더욱 더 줄어갔다. 그리고 지금, 이틀 전의 여름은 온데간데없이 한 순간에 초겨울이 찾아오고 말았다. 반바지를 입을 수 없는 날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주가 앞으로의 나날들보다는 그래도 덜 추울 것이라는 생각에, 덜덜 떨며 반바지를 입었다.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하고자 했던 것을 하기 위해서.


반바지를 입을 때를 놓쳐버린 내 모습이 글을 쓰려 하지만 자꾸 완성하지 못하는 요즈음의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바지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입지 못하는 시기가 온 내 모습은, 마치 바쁜 일상 아래서 구상만 하고 글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과 꼭 닮아있는 것 같다. 추위를 무릅쓰고 반바지를 입고 나간 내 모습처럼, 무언가 행동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짧은 글을 완성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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