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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Nov 20. 2016

우연히 본 것 치고는 과분했던 공연

톤즈프로젝트 - 한올 공연을 보고

 수요일에 이별을 하고, 줄곧 술만 마셨다. 내게 싼 술, 비싼 술 할 것 없이 술을 그렇게 양껏 사줄 수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3일이었다. 학기 중인 주제에 수업 시간에는 멍하니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술자리에 가서 술을 먹고, 2차, 3차까지 술을 먹은 뒤, 휘적휘적 집에 들어와 자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술에 절여져서 일어난 또 어느 오전, SNS에서 팔로우하는 한올이라는 여가수의 타임라인에, 그 날 오후 자신의 공연 티켓이 15장 남았다는 그런 글을 보고,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예매를 눌렀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우울한 내게 필요한 것은 공연이라는 생각에서였고, 그다음 이유는 올해 중순쯤 가지 못한 한올 단독 콘서트 대신 갈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기획자가 아는 동생이었다.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건이 모두 갖춰졌다.


 집에서 종각역까지는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집이 역세권임을 새삼 깨달았다. 마침 그 날은 11월 12일, 시위가 있는 날이었다. 약간 한산한 느낌의 거리와는 다르게, 대중교통은 시청으로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실연의 고통에 술만 먹고 자고 했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돈은 보내 버렸고, 아는 동생에게 가겠다는 말까지 해 놓았는데 안 가기도 애매한 상황. 공연 끝나고 시위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각에 있는 빌딩의 옥상이 공연장이었다. 시위의 한가운데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아는 동생은 공연에서 엔지니어까지 맡고 있었다. 시위 때문에 음향업체들이 죄다 펑크를 내 버렸다며 울상이었다. 사실 이 순간까지 시위에 가는 것이 맞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정신없이 예매한 결과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주변은 시위의 함성으로 가득하고, 공연장도 준비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하고, 시청에 나가 있는 친구는 계속 시위 상황을 문자로 보내오고. 우울감에 떠밀려 여기까지 와 버린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서, 약간 서글퍼질 지경이었다.

감사하게도 영상을 찍어서 올려주신 분이 계셨다. 첫 곡이었던 "널 위한 노래"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의 파도들이 주변 시위 열기와 맞물려서 멍한 상태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곡은 꽤 유명한 곡인 "널 위한 노래"였다. 가볍게 발을 구르며 가사를 입으로 따라 부르니,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왔다. 신기하게도, 공연 시작 전에는 옥상이어서 시위의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었는데, 공연이 시작되자 하늘이 뚫린 공연장인데도 온전히 음악만이 들리는, 바깥과는 단절된 공간 같은 느낌이 되었다.

 한올은 정말 노래를 잘 했다. 자신의 노래 여섯개 쯤, 그리고 두어개의 커버곡을 공연했는데, 공연장에서 듣는 목소리가 음원보다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혀 처음 듣는 노래를 할 때도 중간중간 하는 멘트는 엄청 능숙하지는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털털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약간은 어수룩한 멘트가 마음에 더 와 닿았다. 많은 멘트들 중, 몇 개의 곡 뒤에 덧붙여진 설명은 그 곡을 다시 한번 들어보게끔 했다. "Flight"라는 곡에 덧붙여진 멘트가 특히 기억이 난다. 유학을 가게 된 남자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저 비행기가 그 사람이 탄 비행기가 아닐까 하고 쓰게 된 곡이라는 설명. 사실 한올의 노래들 중 Flight는 크게 좋아하는 노래가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나서는 많이 듣는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싱어송라이터만이 가질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


 노래를 얼마나 잘 하는지는 사실 글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상깊었던 곡을 두개 더 꼽아서, 영상을 찾아 보았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밤"

 암전 무대는 이 공연을 기획했다던 내 친구가 몇 년 전부터 종종 말하던 그런 무대였다. 친구의 기획이, 심지어 무명도 아니고 꽤 이름 있는 가수인 한올을 통해 실현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물론 그런 것을 철저히 배제하더라도 정말 멋진 무대였다. 곡과 정말 잘 어울리는 무대 구성이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

 헤어지고 듣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가슴에 큰 파도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도, 100명쯤 되는 관객들과 하나하나 대화를 나누고 사진까지 찍어 준 한올.

  공연을 보고 나서, 여전히 나의 현실, 우울한 이별을 겪은 사람이라는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없던 추억이 마음에 들어찼고, 마음은 한 결 가벼워졌다. 갑자기 가게 된 공연 치고는, 내 슬픔을 꽤 많이 덜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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