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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Dec 31. 2016

감기가 내게서 앗아간 것들

 이번 감기는 참 길어서 그것에 대해 한번 더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들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옮겨 적어보고자 한다.


1. 노래

 집에서 혼자 기타치며 부른 노래를 녹음하면서 혼자 피드백하거나, 코인노래방에 가서 혼자 목청껏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씩 떠오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가사를 붙여 보거나. 나에게 있어 정말 즐거운 것 중 하나이고, 또 정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인데 감기에 걸리니 할 수가 없다. 어제 감기가 조금 수그러든 것 같아서 괜히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불러 보았는데, 목에서는 나뭇가죽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다음날 아침에는 괜히 목이 더 따가운 듯 했다. 감기가 나았는지의 척도를 노래를 예전처럼 할 수 있는지로 잡아야 할 지경이다.

2. 술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말인지라 듬성듬성 술자리가 생기는데, 하나도 참석하지 못했다. 내 감기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부비동염을 업고 와서, 알코올이 몸에 들어갔다가는 염증이 폭발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타이레놀을 먹고 있을 때는 절대 술을 마시면 안되니까. 두 달쯤 전인가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때 놓고 간 소주를 뚜껑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괜히 감기에 걸리니 눈길이 간다. 평소에는 얌전히 저녁만 먹던 친구들이 괜히 술을 더해서 먹자는 제안을 자꾸 해 온다. 못 마시게 되니까 괜히 그런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고 하는 것인가...

 3. 롱코트

  겨울을 좋아한다. 눈도 좋고, 극세사 이불의 감촉도 좋고, 갑자기 하얘진 세상도 좋고, 얼굴을 덮쳐 잠을 깨우는 차가운 공기도 좋지만, 겨울 옷이 좋기 때문도 있다. 검정색 롱 코트와 베이지색 패딩을 가지고 있는데, 감기에 걸린 이후로는 쭉 패딩만 입고 다녔다. 코트는 목도 가려지지 않아서 따로 목도리를 해야하고, 앞도 터져 있기 때문에 감기에는 쥐약이다. 갑자기 단벌 신사가 되어 버렸다. 괜히 코트를 입을까 망설여보고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몰려드는 기침에 정신을 차리고 패딩 쪽으로 향하곤 하는 아침의 반복이다.

  4. 대화

  글을 쓰다 보니 하나가 더 생각나서 덧붙여 본다. 마음 맞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최근에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여럿 생겼다. 그런데 감기 때문에 대화가 세 문장 이상 이어지지 않고, 실컷 기침을 하고 지친 표정을 하고 있으면 상대방이 선뜻 뭐라고 말을 건네기 힘든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래서 감기는 괜찮으시냐, 약은 챙겨 먹고 계시냐,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가 버린다.


  난방비를 내 용돈에서 제하기 때문에 아껴서 트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난방비 아끼다가 약값이 더 나간다고, 방 따뜻하게 해 놓고 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내게 말씀하셨다. 딱히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감기에 걸려 놓고 나니 약값도 약값인데, 감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큰 것 같다. 방학이 시작된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위의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다른 것을 할 수도 없다. 무리하면 회복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요즘이었던 것 같다.

  감기약은 내일 아침 분량이 마지막이다. 내일 아침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으면. 그리고 약을 더 타는 일 없이, 감기가 깨끗하게 떨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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