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오후 무렵 생각지도 않은 탈출구가 나타난다. 아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들을 눈앞에서 만들어 내는 일이 그러하다. 아이에게 집 밖에서 보이는 잡초와 나뭇잎, 돌멩이 모두가 재미있는 장난감이자 오브제가 된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타는 그네는 시간을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는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친구와 손잡고 무엇을 속삭이는지 산책이라는 이름을 들어 동네 이곳저곳을 누빈다.
학교가 끝나는 오후 두 시부터는 아이의 세계가 활짝 열린다. 햇살이 그를 환영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은 봄날의 기운이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무거운 책가방은 집 어디쯤 휙 던져놓고 문을 꽝 닫고는 나간다. 목이 마른 아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에너지를 충전한 다음 하루의 2막을 연다.
우리 집 막내 얘기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간다. 옷장 속 바지는 꽉 끼고 길이는 짧아졌다. 웃옷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소매도 짧아져 입고 벗는 게 힘들 정도다. 땅에 풀이 자라기 시작하고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이면 아이는 이만큼 커간다.
꽤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감감무소식이다. 놀이터로 나가보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다. 남색 점퍼를 입고 분홍색 하트 핀을 낀 아이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미끄럼틀 아래서 친구와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이제 네 시가 다 되어가. 집에 가자.”
“엄마 얼른 와봐. 보여줄 게 있어. 아마 깜짝 놀랄걸.”
아이가 재촉한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한걸음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케이크다. 봄꽃과 잡초, 나뭇잎으로 장식했다. 촉촉한 카스텔라를 대신한 건 놀이터 바닥을 이루는 모래다. 어느 날은 제비꽃이 중앙에 자리 잡았다. 개나리와 동백꽃도 등장한다. 아이들이 창조해 낸 그건 먹을 수 없기에 더 먹고만 싶어 지는 세상에서 유일한 케이크였다.
내 얼굴빛이 금세 바뀌었다. 미소 짓는 일이 어색할 만큼 굳어 있는 내게 보름달 같은 미소가 빙긋이 흘렀다.
“와 너희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니. 아주 예쁘다. 너무 먹고 싶고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아이들에게 폭풍 칭찬을 했다. 아이들이 완성한 케이크는 눈이 둥그레 질만큼 감동이었다.
아이가 사진을 찍어서 함께 한 친구 엄마에게도 보내 달라고 했다. 오래 간직하기 위한 쉬운 방법이었다. 둘이 힘을 모은 작품이 뿌듯했나 보다. 봄날 아이의 케이크가 대여섯 개 완성되었다. 자연의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언제나 무엇으로든 새로운 게 가능하다. 고양이 얼굴을 닮은 고양이 케이크, 어느 바닷가 조개껍질이 함께하는 여름날의 바다 등 이름도 재밌다.
아이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바깥세상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어떤 놀이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 그곳엔 있다. 어른의 눈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뿐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이 보배인 아이들이었다. 아이는 만들었다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마음과 현실이 제대로 되지 않음을 절로 배운다. 실패와 성공의 이분법이 아니라 다시 하면 가능해지는 게 아이들의 세계다.
“엄마 나 아까 케이크 만들면서 친구랑 좀 다투기도 했어. 내가 이렇게 하려는데 친구는 다르게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다 다시 완성했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비밀이라며 털어놓는다. 소위 갈등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서로 원하는 방향이 다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른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서로가 괜찮다고 아닌 척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색함과 후련하지 않은 자국이 남아 있을 터였다. 아이는 맑다.
몇 시간만 지나면 내일이고 다시 만날 것인 분명한데도 서로가 “안녕” 인사를 몇 번 건네는지 모르겠다. 저 멀리 집으로 들어가는 친구의 얼굴에서도, 아이 역시 더 놀고 싶다고 아쉬움이 가득하다. 귀엽다.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려고 하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지만 간단치도 않다. 예전에는 작은 오븐에서 몇 번 구웠지만 옛이야기다. 어느 디저트 카페에서 만난 초콜릿과 딸기, 티라미수 케이크가 어른거린다. 내가 생각하는 케이크는 집에서 만들거나 사 먹거나 그 이상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 너머를 생각해낸 셈이다.
지금도 케이크 하면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상징과도 같은 디저트다. 아이도 가끔 자기 생일이나 가족 누구의 기념일을 기다린다. 케이크 앞에서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을까? 아이가 친구와 함께 만드는 케이크 역시 그런 추억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마음 같다.
아이가 부럽다. 토끼와 고양이를 케이크로 불러들이는 기발한 상상력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모습은 어설픈 것들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어른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봄날의 케이크가 한동안은 놀이터 한편을 장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