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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3. 2021

그 여름의 감자탕을 소환하다


여름이지만 따끈한 국물이 당긴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건 우거지를 가득 넣은 감자탕. 바닷가 주변으로 네 멋대로 비쭉 대는 바위처럼 보이는 돼지 뼈들이 적응 안 되다가도 반하게 된다. 감자탕을 만들다 문득 깡마른 몸에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그 아이가 떠올랐다.   

  

대학교 3학년 즈음이었다. 외할머니 외삼촌과 함께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의 공부를 살펴주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만화를 그리던 외삼촌은 하나뿐인 조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는 내게 감사하다는 의미로 소개해 준 언니와 함께 감자탕을 사줬다. 냄비처럼 보이는 깊은 그릇이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올려져 있고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들깨 향이 가득했다. 낯선 음식이 조심스러웠지만, 한국 자 떠먹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함이 입안에서 오래 기억되었다.      


시내 길모퉁이 허름해 보이는 식당이었다. 오가는 이 별로 없는 휴일 저녁이었는데 언니와 외삼촌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뭔가 불만족스러운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누나의 이혼으로 아이를 맡아 키워야 했던 그들의 가족사며 일상이 오갔다. 그들과 한참이나 나이 차이가 나던 난 조용히 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할 뿐이었다.  

   

첫 추억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법이다. 감자탕을 알게 된 건 행운이었지만 함께하는 내내 비행기 아래로 가득 깔린 구름처럼  고단함과 고민이 드리웠다. 아이는 도시의 중심에서 보기 힘든 초가집에 살았다. 공부가 끝난 저녁이면 밖은 가로등마저 드물어 칠흑같이 어두웠다. 집으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듯했다.      

이십여 년이 지난 그 시절 외삼촌이 전한 감자탕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한 마음이었다. 어색한 자리였지만 배고픈 대학생에게는 세상에 이리도 맛있는 게 있을까 할 만큼 먹어도 또 먹고 싶었다. 구멍 난 물독에 물을 붓듯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석 달을 간신히 채우고 과외는 끝이 났다. 조심스럽게 그만해야겠다는 소리를 듣고 잘되었다 싶었다. 어려운 형편임을 아는 상황에서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를 붙들어 가르치는 일이 내내 미안했다. 일주일에 세 번, 봉숭아가 흐드러진 집, 마당 풍경을 감상하는 건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감추고 싶어도 어느새 살며시 흘러나오는 우울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 내게 감자탕은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 가끔 식탁에 올리는 메뉴다. 여름이어서 그런지 비는 잦고 기온도 들쭉날쭉하다. 무뚝뚝한 남편이 퇴근하는 얼굴을 살필 때면 얼마나 많은 돌멩이를 안고 살아가나 싶다. 큰아이 역시 기말시험 준비로 주말에도 도서관으로 향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귀찮다 여기면서도 돼지등뼈 한 팩을 사 왔다. 저녁에 행복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이 음식은 찬 바람이 부는 때에만 어울릴 것 같지만 사계절 무리가 없다. 겨울에는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며 몸에 찬 기운을 몰아내고, 여름은 땀을 흘리니 오히려 시원하다.


감자탕은 과정이 만들어 내는 한 그릇이다. 각각의 재료들을 준비해놓고 따로 또 같이 버무리는 만남의 시간이 필요하다.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담박함이 풍긴다. 시간과 부지런한 손의 절묘한 하모니가 요구된다.      

뼈를 끓는 물에 3~4분 정도 데쳐낸다. 집에서 먹다 남은 소주나 맥주가 있어 부어주면 고기의 잡내를 없앨 수 있다. 건져낸 것을 두세 번 차가운 물에 씻는다. 가장 복잡한 과정을 마쳤으니 5부 능선은 넘었다.     


겨울에는 큰 냄비에 뼈와 물을 넘고 한 시간 남짓 끓여 주지만 여름에는 더운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다. 이때는 딸랑이 압력밥솥이 수고를 대신해준다. 솥에 차곡차곡 고기를 올린 다음 3분의 2 이상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이때 청양고추 두 개 정도를 넣어주면 국물 맛이 깔끔하다. 강 불에서 끓이다 중간 불로 바꿔서 30여 분을 보낸다.     


뼈다귀가 익어가는 동안 얼갈이배추를 씻고는 큰 냄비에 푹 삶아준다. 잎보다는 줄기 부분이 단단하기에 아랫부분부터 끓는 물에 넣는다.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 건져내고 찬물에 담갔다 꺼낸다. 여기에 된장, 마늘을 넣고 팍팍 주무른다. 솥에 한 김이 나가면 기름을 걷어내고 우거지를 넣고 다시 끓인다. 이때 대파를 어슷하게 썰어 놓고 깻잎나물을 수북이 올린다. 벌건 국물보다는 맑은 게 좋아 들깻가루만 넣었다.     


감자탕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뼈에 붙어 있는 흐드러진 살들을 발라 먹는 재미다. 식구마다 앞접시를 놓고 한 덩어리를 꺼낸 다음 젓가락질을 하다 결국에는 손이 동원된다. 이 순간만큼은 기름이 살짝 묻은 뼈다귀를 잡는 손에 정이 간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부엌에 머물렀다. 재료를 손질하며 불을 조절하는 시간이었다.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라는 이유로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까닭에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감자탕이다. 정확히 말하면 뼈다귀 우거지탕이 정식 명칭인 듯싶다. 감자 없는 감자탕도 괜찮다. 누구도 감자를 찾지 않았다.    

 

모두가 정신없이 열심히 먹는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오른손에 뼈다귀를 들었다.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으며 합창하듯 “잘 먹었어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감자탕을 사이에 두고 20대 어느 여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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