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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6. 2021

절박함이 준 선물

김장김치와 김치전


여름 태양 빛만큼이나 강렬한 음식을 만났다. 빨간빛이 이글거리는 한낮 거리를 다니는 일이 두려울 정도인 계절 느낌을 담은 김치전이다. 이것의 주인공인 김치는 딱 반년을 넘긴 김장김치다. 냉장고를 열고 깊은 통에서 한 포기를 꺼낼 때 퍼져 나오는 냄새가 시간을 말해준다. 

    

“아, 이게 무슨 냄새야?”

퇴근한 남편이 얼굴을 찡그린다. 베란다 문을 더 활짝 열고는 한참이나 못마땅한 표정이다. 순간 섭섭하다. 김치전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허겁지겁 달려들더니 김치 냄새를 거부하는 모습은 모순이다.      


겨울 추위가 시작될 무렵인 12월 중순의 토요일 10시 무렵부터 시작된 김장이었다. 거실에 은빛 반짝이는 야외 매트를 깔고 털썩 앉았다. 지난 저녁에 만들어 둔 양념을 한 움큼 들고 배추에 적당히 버무렸다.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장염으로 3일을 입원하고 집으로 오니 이번에는 남편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상태여서 며칠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원고 교정을 오랜만에 하던 터라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가 집에 와서는 온종일 일했다.    

삶에서 가장 바쁜 날을 꼽으라면 우선순위에 들 정도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움직이지 않고 노트북에 얼굴을 고정했다. 무슨 큰일을 하려는 듯 무표정한 듯하면서도 심각한 얼굴이다. 걱정과 불안이 한 세트가 되어 찹쌀떡처럼 딱 붙었고, 마감을 맞춰야 했기에 시간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너무 바빴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김장만이 해결되지 않은 과제였다. 집에서 이 것을 해낼 사람은 나 혼자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과 긴장이 감돌면서 오로지 빨간 양념과 허연 배추에만 집중했다. 통을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나 일어나 허리를 폈다. 그렇게 김치통 3개가 채워졌다.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넉넉함이었다. 김치는 겨울을 지나 봄, 여름으로 오기까지 식탁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매일 오르는 게 당연하다 생각되다 6월 즈음부터 눈이 둥그레지는 환상적인 맛을 알게 되었다.     


김치는 시큼하면서도 달콤하고 시원했다. “밥에 김치만 먹어도 맛있다”라는 말에 200퍼센트 공감할 정도다. 한동안 고춧가루 물이 스며들다 못해 익어버린, 그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김치전을 종종 만든다.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를 살짝 섞어 담백함을 더해 건강한 풍미를 전한다.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메밀이 김치 사이에 끼어들어 최고의 하모니를 이룬다. 빨리 익는 메밀의 성질 탓에 기름의 눅눅함도 잊게 한다.     


내 손을 거쳐 시간이 만들어준 김치를 보며 몇 가지를 배웠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습관이었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다면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미뤘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은 굴로 들어가 꼼짝 않고 TV를 멍하니 보고 있거나 누워 있지 않을까 싶다.    

  

절임 배추 두 상자를 예약한 날짜에 마트에 가서 들고 왔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이 밝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냥 계획했던 대로 하는 게 최선이었다. 김장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고 딱 두 시간이 지날 무렵 오른 손목과 팔이 너무나 저리면서 아팠다.      


왜 이런 통증이 찾아왔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파스를 찾아서 붙이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야 생각이 났다. 내 손이 불과 몇 시간 전에 혹독한 운동을 해댄 것이었다.     


뒤로 미뤄두고 있을 것이었지만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일으켰다. 지금은 그때 몰랐던 기쁨을 김치가 전해준다. 내 손으로 해냈다는 당당함과 갑작스럽게 꼬여 버린 일들을 하나씩 풀어나간 내가 고맙다.     

  

김치 양념에 특별히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고춧가루가 있었기에 액젓과 마늘, 양파 등 기본재료만 넣고 간단하게 했다.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끝낸 김장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서인지 다른 해보다도 김치 맛이 특별하다.      


전은 김치만 송송 썰고 매실청 한 숟가락, 메밀가루는 점성이 약간 생길 정도의 서너 숟가락에 물을 조금 넣고 휘휘 저으면 준비 완료다. 다른 가족들은 모르는 나만의 감동이다. 한 숟가락 똑똑 떠 넣으며 전을 부쳤다.      


비뚤비뚤 모날까 봐 숟가락을 들어 모양을 다듬는다. 잘 살아가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삶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다 기름에 어느 정도 익기 시작하면 팬에 놓인 모양을 어찌하기 어렵다. 이때는 받아들여야 할 때다.     


김장김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초록으로 빛나는 계절에는 얼핏 보기에는 답답한 느낌이다. 천천히 살펴야, 음미해야 알게 된다. 내가 겨울에 주저앉았다면 지금의 맛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이 복잡할수록 생각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야 할 때라는 데 적극 동의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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