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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07. 2021

익숙함이 지겨울 때 육개장


며칠 전부터 벼르던 일을 하기로 했다. 주부가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음식을 생각하고 상에 올리는 일은 나름의 메시지를 담는 작업이다. 다른 취향과 계절, 날씨를 고려하는 세심함이 담긴다. 이런 마음 씀이 분주한 때는 추운 겨울이거나 요즘처럼 더운 여름이다. 

   

엄마는 병치레가 잦은 아버지를 위해 일 년 내내 싱싱한 재료들로 찬을 만들고 갓 지은 밥을 상에 올렸다. 그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밥은 그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정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부엌에 머물며 무언가를 해내는 엄마의 대단함을 어렴풋이 알아갔다.    

 

내 손으로 만드는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어설퍼도 내가 만든 것들에 정이 간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것도 내가 만든 먹거리다.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육개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익숙한 음식에 지겨워질 즈음 던지고 싶은 진심이었다.     

 

장마가 시작되었고 집 안 곳곳이 습하다. 비는 변덕쟁이처럼 오가다를 반복한다. 지혜로운 부엌 생활이 필요한 시기다. 불 사용은 가능한 덥지 않은 때 미리 해 두거나 오래 걸리지 않는 메뉴들로 식탁을 차리는 것. 가끔은 예외도 있다. 육개장이 그러하다. 이름만 들어도 복잡하다 여길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간단하다.      

휴일의 끝자락에 가스불로 주위를 덥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거실 앞뒤로 흐르던 낮이었다. 애들과 점심을 끝내고 중요한 준비에 나섰다. 우선 양지머리를 물에 30분 정도 담가 핏물을 뺀 다음 삶았다. 이 과정은 한 시간 정도가 평균이었지만 부드럽고 진한 맛을 위해 30분을 더했다. 육수와 육개장의 감칠맛을 좌우하는 핵심인 고기가 준비되었다.      


집에 있는 대파 뿌리와 대파 하나를 크게 손으로 잘라 넣고 마늘 대여섯 알도 함께 했다. 고기가 잠길 정도의 충분한 물을 붓고는 끓였다. 조용하던 냄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해야 할 것도 없다. 강에서 중간으로 불을 조절하고 은근하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     


“센 불이면 음식 맛이 없다. 불 좀 줄여라.”

가끔 아버지는 내가 요리하는 걸 보고는 한마디 던졌다. 중학생일 무렵, 엄마가 가끔 아픈 외할머니를 간호하느라 밤을 새우고 늦게 오는 날이면 내가 아침을 차렸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맛을 좌우하는 건 불을 쓰는 자세에 달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때는 잔소리로 해석되어 외면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립고 소중하다. 음식을 조리하는 일은 시간과의 경주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귀찮고 빨리 끝내고 싶어서 강한 불을 이용하면  원재료의 맛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불 앞에 선 이가 시간을 움직이는 조정자가 되어야 제대로 된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일요일은 언제나 빠르게 지난다. 시계를 보니 5시다. 처음 시작할 땐 여러 가지 나물을 넣어서 풍성함을 주고 싶었는데 마음만 앞섰다. 집에는 불려놓은 고사리와 넉넉한 대파가 전부였다. 토란 줄기 말린 것을 준비하려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아쉽다 여길 무렵 숙주가 생각났다. 가까운 동네 마트에서 1500원을 주고 한 봉지를 샀다.  마늘을 까고 대파는 씻어서 한편에 두었다. 숙주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쳤다. 낮에 삶아둔 고기를 결대로 찢는다. 짙은 검 갈색을 띠는 그것이 부드럽다. 대파를 큼지막하게 썰고 마늘도 다졌다.   

   

재료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큰 양푼에 모두를 담았다. 엄마표 집 간장과 매실, 고춧가루를 넣고 손으로 잘 버무렸다. 한번 거른 맑은 육수에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순간이다.   

   

“맛없으면 어떡하지?”라고 혼잣말한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 맛을 봤다. 생각했던 그게 아니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오기에 프로폴리스를 조금 먹은 게 더 독이 되었는지 입안은 쓰고 칼칼하다.     


싱거우면 소금이나 다른 걸 동원하면 금방 괜찮아지지만 이건 그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간이 만들어 주는 깊은 향을 찾기가 어렵다. 다른 이들의 레시피를 찾고 고민하다 들깻가루가 생각났다.     

 

이건 내가 사랑하는 요리의 마법사다. 고소하면서도 강한 부드러움이 부족분을 채워준다. 냉동실에 놓아둔 그것을 꺼내어 세 숟가락을 넣었다. 국물은 그동안 경험했던 육개장이 아닌 감자탕이 떠오른다. 다행히 전보다는 괜찮아졌다.      


날은 흐렸기에 그리 힘들지 않고 육개장을 완성했다. 더운 날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내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또 만들어 두어도 아이들은 원하는 것만 집을 뿐이다. 그 순간에 밀려오는 허탈함도 싫었다.    

  

한 그릇으로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춘 육개장을 택했다. 어릴 적에 엄마는 가끔 돼지고기를 넣은 고사리 육개장을 끓여주었다. 제주도 향토 음식으로 메밀가루에 푹 익은 고사리와 대파와 마늘이 어울린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     

  

몸에 얼큰하고 뜨끈한 것이 들어가니 살며시 땀이 흘렀다. 아이들은 건더기보다는 국물에 끌렸고 남편과 난 한 그릇을 정직하게 비웠다. 김치와 채소 몇 가지가 전부인 찬이어서 설거지할 게 별로 없다. 오후 늦게서야 잠들었던 막내가 깨어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릇에 얼굴을 대고 국물을 음미한다. 마지막에는 밥을 조금 떠서 말아먹었다.      


“엄마 이거 우리 학교 것보다 정말 맛있다. 엄마가 최고야.”

급식에서 가끔 나오는 그것과 비교한다. 이 맛에 밥상을 차리나 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저녁 시간이 그런대로 잘 흘렀으니 이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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