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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21. 2021

마음 범벅인 날, 호박범벅

 

포근한 날이다. 눈 내리던 금요일을 지나 주말을 지내고도 마음은 여전하다. 여러 감정이 자꾸 스쳐 가고 머물러서 불편하다. 머릿속은 해야 할 일로 꽉 차 있지만, 몸은 더딘 날이다. 이런 날은 나를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토요일에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호박범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호박이 주인공이 되어 고구마와 팥이 두루 어우러진 음식이었다. 

  

요리연구가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이름만으로도 끌린다. 호박을 마주하면 언제나 시골 어느 담벼락에서 익어가는 풍경을 떠올릴 만큼 정겹다. 십여 분을 보니 매우 간단한 조리법이다. 늙은 호박과 단호박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 외에는 별다른 게 없다. 일요일에 팥을 씻고는 물을 부어 불렸다. 늦은 오후에 해 볼 생각이었는데 하루는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월요일이다. 하루 저녁을 보낸 터라 더 부드러워진 팥을 삶았다. 운동을 다녀오니 자꾸 호박범벅이 생각났다. 함께하는 동네 친구가 사준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와서는 식탁에 앉자마자 몇 모금 마셨지만 별 도움이 안 되었다. 호박범벅이 자꾸 떠올랐다. 나를 위해 만들기로 했다.     

단단한 옷을 벗은 호박 속살은 언제나 그렇듯 말갛고 귀엽다. 겉은 푸릇한 껍질이었는 데 신기하게도 속은 주황이 감도는 잘 익은 늙은 호박이었다. 동네 가게에서 사 온 단호박은 아직 덜 익었는지 그리 진하지 연둣빛이 살짝 감돈다. 넓은 냄비에 크게 썰어 놓은 호박을 담고 절반 이상 잠길 정도로 물을 부었다.     


십여 분이 지나 보글거리기 시작하고 삼십 분 무렵이면 호박이 물러지기 시작한다. 적당한 단맛을 위해 함께 넣은 고구마도 눌러보니 쏙 하고 들어갈 만큼 잘 익었다.  덩어리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더 맛있다고 하니 그대로 두었다. 찹쌀가루를 물에 풀어서 넣으면 더 차진 맛이 있지만, 집에 없어서 지나갔다.     

 

설탕과 소금을 넣고 풍미를 끌어올려 주었고 삶은 팥을 더했다. 그릇에 조금 덜어내어 맛을 봤다. 호박의 부드러움에 고구마의 은은한 달콤함과 따뜻함이 참 좋다. 작은 볼에 두세 번을 덜어 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 좋은 단 맛이 강하게 올라와 입안에 잠시 머물다 간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주변에 특별한 일이 생긴 건 아니지만 불편한 기분이 내내 이어진다. 그동안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부지런히 달려왔다. 그 후에 찾아온 피로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울이라는 녀석이 나를 조금 점령하려나 보다. 아마도 내가 바라보기 싫은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찾아오는 중인가 보다. 그동안보다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시간 내에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주변을 어슬렁거릴 일이 없을 것이다. 김장과 겨울을 보낼 차 담그기도 끝냈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몸이 머뭇거리는 걸 보니 조금 멈추고 싶은 모양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런 나를 꺼내어 보이고 싶지 않다. 자꾸 내 속으로만 들어간다. 자꾸 먹을거리들이 아른거린다. 

    

호박범벅이  가장 먼저다. 이것을 먹으면 조금 좋아질 것 같았다. 호박과 고구마가 살짝 씹힌다.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찬 기운을 서서히 몰아내듯이 나를 감싸 안는다. 튀지 않기에 자꾸 손이 간다. 지금 내 곁에 누가 지나간다면 “호박범벅 한 번 만들어 보세요. 당신에게 큰 선물일 거예요.”하고 말하고 싶을 만큼이다.     


저녁에도 또 한 그릇을 먹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먹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내가 안쓰럽다.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도 이것으로 마음을 두지 못하는 나를 달랬다. 어제보다는 더 기운을 내는 중이다. 몬스테라와 스타피필름에 물을 주고 책을 조금 읽었다. 이럴 때면  나를 바라보는 일이 힘들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돌이켜보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다. 언제나 그렇지만 직면하는 작업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어렵다.      


거실을 닦고 빨래를 하고 매일 하던 일을 무심코 해갔다. 그럼에도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있어 좋다. 날씨가 포근하지만 잠깐씩 느껴지는 것은 겨울의 찬 기운이다. 이 계절에는 손과 발이 얼음처럼 차갑다. 집에 보일러를 몇 분 동안 켜서 온기를 돌게 한 다음 호박범벅을 들었다. 내일이면 좀 괜찮아지려나. 이 겨울을 위한 나의 소울푸드가 하나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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