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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23. 2021

동지 팥죽 한 그릇


동지다.  팥죽 먹는 날이다. 동네 친구는 며칠 전에 미리 동지죽을 먹었다고 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팥죽을 먹으며 마음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싶다. 저녁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다. 며칠 전부터 아이들에게 팥죽을 먹자고 지나는 말로 해 두었다. 엄마와 통화 중에 맛있는 팥죽 만드는 법을 들었지만 내가 편한 대로 하는 게 제일이다. 팥죽은 번거롭다 여길 수도 있지만, 팥만 준비되면 맛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음식이다. 팥은 며칠 전 호박범벅을 위해 넉넉히 삶아 두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불린 쌀을 넣고 죽이 다 되어갈 즈음 팥을 더해 보글보글 끓여내었다.      


새알심은 생략했다. 지난해는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지만, 찹쌀가루도 없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앞선다. 내가 새알심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마음을 두지 않았다.  

“엄마 새알심은 자기 나이만큼 먹어야 한다고 우정이 할머니가 얘기했다는데, 우린 없어?”

막내가 식탁 위에 놓인 죽 그릇을 보다가 한마디 건넨다. 

“응 오늘은 생략이야. 가래떡 몇 조각 올렸으니 그걸로 대신하자.”

아이의 말에 새알심이 살짝 아쉬웠지만 귀찮다 여기고 지났다.    

아이들은 설탕을 조금 넣고 먹는다. 단팥죽이 아닌 이상 설탕을 넣은 적이 없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고 자연스레 배웠나 보다. 내가 사는 이곳에선 팥죽이라고 하면 칼국수 면이 들어간 것을 칭했다. 처음 이사 오고 나서 친구가 팥죽을 사준다 해서 식당에 갔다.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숟가락에 가득 담긴 설탕을 팥죽 그릇에 넣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리마다 설탕이 든 작은 옹기 항아리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팥죽은 흰쌀이 들어가 팥과 적당히 어우러진 것이었는데 상상조차 못 해본 것이었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다른 모습, 새로운 발견 같았다.   


동지 즈음 제주 사람들은 귤 수확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누가 앞서 과수원으로 나가는지 경주라도 하듯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경운기 소리가 들렸고, 다시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올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의 에너지가 저리도 쉼 없이 이어져도 괜찮을까 생각될 만큼 두 달 정도의 시간은 귤 따기에 초집중했다. 그럼에도 이날은 꼭 팥죽을 해 먹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솥이 네 개 걸려 있었다. 가장 작은 국 솥에 이어 큰 것이 주로 밥을 담당했다. 동지에는 그곳에 가득 팥죽을 쑤어 사람들과 어울려 먹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부모님만으로는 귤 따는 일이 버거웠다. 귤은 함박눈이 쌓이기 전에 빨리 수확하는 게 일 년 농사의 핵심이었다. 이 시기에는 비교적 밭농사를 많이 지었던 송당, 구좌, 한림 등 먼 거리에 있는 마을 어르신들의 손을 빌렸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매일 오가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언니의 방이 할머니들의 숙소가 되었고, 12월이 다 가도록 함께 지냈다.     


여섯 식구에서 다시 서너 명이 들었으니 한동안 집은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다. 겨울이 깊어질 즈음이면 언제나 큰 상을 두 개 펴서 식사하는 대가족으로 변신했다. 아침저녁에는 욕실은 물론 집안 곳곳에서 제 일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주했다. 동지가 가까워질수록 진눈깨비가 많이 날린다. 바람은 태풍을 몰고 온 파도처럼 거셌다. 몸으로 느끼는 바깥 기온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춥게 느껴질 정도다. 한 해는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을 만큼 내렸다.  당연히 과수원은 눈밭이다. 이날 하루는 자연스럽게 일을 쉬어가야 한다. 집에 있는 할머니와 아줌마들은 예상에 없는 휴일을 맞이했다. 방 안에서 이런저런 수다 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 이때가 동지면 모두가 기다리는 특별한 밥이 상에 오른다. 팥죽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엄마는 쉴 틈이 없다. 점심을 위해 불려둔 팥을 삶는다. 아궁이에 큰 장작을 가져와 불을 때고 팥을 솥에 넣고 푹 끓인다. 이때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던 어르신들이 하나둘 부엌에 모이기 시작하면 어느새 사랑방으로 변신한다. 검은 그을음이 가득한 벽, 나무 타는 소리와 불 냄새는 부엌을 신비로운 곳으로 바꿔놓았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나무 방석에 의지해 앉은 이들의 얼굴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살림 내공이 평균 몇십 년 이상인 그들에게 팥죽 끓이는 비법 또한 남다르다. 자신의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엄마에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의견을 내놓는다. 왁자지껄 그야말로 예상에 없던 작은 잔치가 열린다. 어릴 적 팥죽 먹던 얘기부터 동네 사람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팥죽 한 그릇과 김치가 놓인 소박한 밥상에서 웃음꽃이 크게 크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삼십 년은 훌쩍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어찌 보면 이때 동지는 정말 작은설이었던 것 같다. 친척이나 가족이 아니지만 함께 밥을 먹고 일을 하며 힘든 시기를 나누는 이들이 모였다. 기름 냄새 진동하는 음식 대신 담백한 한 그릇에 마음을 나누며 겨울날을 보냈다. 이때 어렴풋이 추운 날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음식이 지닌 숨은 마력을 알았던 것 같다. 할머니들의 얘기는 참으로 재미있었다. 옆에서 엄마를 도우며 모른 척하던 내가 까르르 한바탕 박장대소할 정도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삶의 희로애락을 살짝살짝 듣는 맛이 특별했다.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내가 초등생이던 시절 라디오에 귀를 갖다 대며 소리로 듣는 드라마에 심취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줄 팥죽을 그릇에 떠 놓고 있는데 오묘한 색에 끌린다. 묵혀둔 팥이기에 색은 그리 곱지 않다. 잔뜩 흐린 날을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겨울 공기’ 같다. 조용하고 사방이 숨죽인 듯한 계절의 분위기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팥죽에는 어둠이 밀려올 듯하면서도 어느 지점에선 밝아오는 기분, 한 해를 정리하는 여러 마음이 담겼다. 특별한 날 먹었던 음식은 그날의 풍경으로 기억된다. 내게 팥죽은 그랬다. 농부의 바쁜 마음 안에 휴식을 주었던 함박눈 내리던 동짓날. 어느 곳에선가 살고 있지만 몰랐던 사람들이 만나 죽 한 그릇으로 소중한 인연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이날의 팥죽은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모양만 낸 팥죽이었지만 엄마는 동지가 되면 팥죽을 식탁에 올렸다는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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