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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30. 2021

김밥 속 빛나는 당근처럼

    

다시 김밥이다. 지난주에 먹었던 것 같기도 한데 가물가물하다.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데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 대충 끝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절반의 솔직함이다. 되새겨보면 김밥을 만들려면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새롭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냥 한 끼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면 김치에 조미김, 아니면 볶음 고추장에 참기름을 더해 쓱쓱 비벼 먹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김밥이란 건 각각의 재료를 손질하고 볶아내는 과정에 흰쌀밥을 새로 지어야 하는 복잡함이 숨어 있다. 한 줄을 말고 나서 가지런히 접시에 올리면 너무나 간단해 보인다. 김밥이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몰랐을 때 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김밥을 생각한 건  마음 쓴 저녁밥을 준비했다는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러 반찬을 준비하기에는 마음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 버리기엔 편하지 않은 날이다. 매일 늦는 남편이 오후 반나절 휴가를 내어서 일찍 퇴근했다.   

   

이런 배경을 모른 척하기는 어렵다. 이런 것들이 김밥의 탄생 이유다. 사계절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 중의 하나가 김밥이다. 김밥만큼은 이제는 나름 도사가 됐다고 자부할 만큼 노하우가 생겼다. 후다닥 손에 모터를 단 듯이 움직였다.     

 

냉동 유부를 채 썰어서 데치고 간장과 매실청을 넣고 조렸다. 어제 사 온 당근도 기름에 볶아 두었다. 지난해 담근 일 년을 보낸 묵은지는 단무지 모양으로 길게 자른 다음 매실청을 조금 넣고 볶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쌀밥을 압력솥에서 완성했다.    

이제 김 위에 밥을 평평하게 펴놓고 재료만 올리면 되었다. 딱 다섯 줄만 말았다. 평소 같으면 열 줄은 평균으로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 힘들다. 지금 필요한 만큼만 하기로 처음부터 마음먹었다. 재료도 간단하게, 김밥 수도 적으니 금세 마무리되었다.     


김밥에 무심할 것 같았던 아이들과 남편도 그런대로 괜찮은 저녁을 보낸 눈치다. 설거지가 늘었다. 귀찮다는 생각에 미뤄둘까 하다가 얼른 끝내기로 했다. 준비하고 먹고 마무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김밥을 다 썰고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친다. 온종일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마음은 이 김밥 속 재료처럼 빛나고 싶은 것이었다 것. 지난여름 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살펴봐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번역 원고였고, 내부에서 정리가 덜 된 상태였기에 재검토 과정을 거치기로 하고 시간이 흘렀다.     


지난주에 그곳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다시 한번 일을 해 달라는 거였다. 시작했으니 마무리 짓고 싶었다. 몇 달 동안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했던 터라 반가웠다. 그때까지가 좋은 느낌이었다.   번역본이었고 내 관심과는 먼 경제 관련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어찌어찌 작업하면 되겠지 마음먹었다. 그동안은 성실하면 웬만한 일들을 그런대로 흘러간다고 여겼지만, 이번은 예외인 듯했다.   


몸이 안 좋아 지난 주말과 월요일까지 앓았다. 스트레스가 밀려오면 나를 엄습해 버리는 기운 없음과 불편함은 휴식을 요구했다.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동네 친구가 만들어준 현미 쌀 핫팩을 단전에 두고 잠을 청했다.   

  

새벽 언제라도 깨우면 일어날 만큼 잠에는 인색한 나였다. 최근에 이리도 많이 잠을 청한 적이 있었을까 할 만큼 잠이 쏟아졌다. 사흘을 보내니 조금씩 기운이 생겼다. 익숙했던 나를 만나게 되어 스스로 반가울 정도였다.     


일을 시작하니 생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고, 잘 가고 있는지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린다는 느낌이었다.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해가면서 살펴보려 했지만 상당한 분량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요일 하루를 꼬박 매달리다 저녁 즈음에 일을 진행하는 걸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에 연락해서 사정을 얘기했다. 작업하는 시간에 비해 작업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원문과 확실한 대조작업은 힘들 것 같다는 상황을 설명했다. 회사는 빨리 결과물을 전해 받고 싶어 했고, 기대치가 있을 것이기에 적절한 의견 교환과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새벽부터 작업했던 터라 몸은 천근만근이고 11시를 넘길 무렵 잠이 쏟아졌다. 무엇에라도 놀란 듯 화들짝 깨어보니 오후 한 시다.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답이 없다. 오후는 쉬어가기로 했다. 집을 서성이며 조금 더 탁월함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무슨 일이라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숨은 능력을 지닌 재야의 숨은 고수가 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끔한 일을 위해 용기를 내어 상황을 솔직히 설명한 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었다.  

   

흰밥과 검은 김 안에서 빛나는 당근의 주황색처럼, 나도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존재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건 이미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종종 큰 산을 만날 때면 이처럼 황당한 꿈을 꾼다. 무엇에도 주저하지 않고 직진해 가는 나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김밥에는 빛나는 당근과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 묵은지와 색 바랜 유부가 있다. 당근색이 곱다고 혼자만 김밥 속으로 들어가 있다면 환영받는 맛을 전하기 어렵다. 젓가락을 들어 몇 조각 먹고 멈춰버릴지 모른다. 김밥을 보며 조화로움을 떠올렸다. 특별하지 않아도 김밥 안에서 모두가 제 역할을 하는 듯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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