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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ug 19. 2022

여름 초록 전

가지, 호박, 깻잎과 함께하는 여름


    

밥 먹는 일. 내 일상의 고민 중 횟수로 따지면 제일 많지 않을까 싶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두고 있어서 바라보기 힘든 것들을 제외한 것 중에는 단연 으뜸이다. 여름날의 밥 준비는 인내가 필요하다. 불 앞에 서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날씨를 고려한 찬을 준비하는 일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후텁지근한데 뜨거운 음식만을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얼음같이 차가운 것 역시 마땅치 않다. 

     

이때 내게 답을 주는 것들이 있다. 상추, 오이, 호박, 가지, 깻잎, 고추…. 밭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올려도 괜찮은 계절이  여름이다. 도시 생활은 땅의 기운이 가득한 싱싱한 것들을 바로 먹을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동네 로컬 푸드에 가면 그럭저럭 괜찮은 야채를 만난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건 가지와 호박, 깻잎, 고추다. 가지와 깻잎은 전을 부쳐 먹고 제법 통통한 호박은 된장찌개로 애용한다. 진한 보라색이 빛나는 가지는 둥글게 썰어서 밀가루 옷에 달걀 물을 입힌 다음 지져낸다. 가지 속살의 부드러움과 독특한 향이 그대로 살아나 이 계절에는 썩 특별한 맛을 전한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깻잎 향은 무더운 계절의 고단함을 잠깐 잊게 한다. 잎들만 가지런히 모아놓은 것보다는 큰 줄기로 뚝 꺾어 놓은 야생의 느낌이 나는 깻잎 다발을 좋아한다. 크거나 작고 군데군데 벌레 먹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잎의 향이 더 진하다. 깨끗이 씻고는 대충 썰어서 양파와 함께 부침가루 서너 숟가락에 계란 하나를 넣고 잘 섞어서 지져내면 끝이다.      


갑자기 사라진 줄 알았던 에너지가 살아난다. 시작한 김에 고추까지 불러내었다. 참치 통조림에 담긴 참치 살에 깻잎을 더한 다음 반으로 가른 고추의 빈 곳을 채웠다. 다시 계란 물을 적셔 중간 불로 천천히 옅은 갈색이 보일 때까지 익혀주었다.     


처음 시작할 땐 간단히 가지전 하나로만 만족하기로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두 가지가 늘었다. 접시에 담긴 그것을 볼 때마다 뿌듯함이 밀려온다. 한 끼 밥상을 그런대로 괜찮은 시간으로 만들어 줄 든든한 먹거리를 완성했다. 나를 향한 만족감도 함께다.      


유독 여름에 이렇게 음식을 만드는 일이 즐거운 건 채소들의 살아있는 빛깔 때문이다. 깻잎과 고추의 초록은 그 자체로 계절의 싱그러움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채소가 식용유를 만나 맑은 초록으로 변하는 느낌이 그저 좋다. 가지는 가지대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왠지 붕 떠 있는 듯한 하루를 고요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 손으로 가정 적극적으로 그 시절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 아닐까?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시간이 소중하다 여긴다. 깻잎을 들어 흐르는 물에 씻을 때 살짝살짝 스쳐 가는 향기, 잠깐 물을 만나자마자 뽀드득하는 말끔하고 윤기 나는 가지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마음의 전환을 가져온다. 기다란 작은 몸 안에 여름의 기운을 모두 담았는지 아찔한 매운 향이 지나는 풋고추의 촉감도 여름이어서 특별하다.  

   

여고생 시절 학교 가는 골목에는 작은 채소 가게가 있었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주인 부부가 시장에서 떼어 온 물건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가게 안의 초록의 미나리와 오이, 배추 등 여러 가지가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그곳을 지날 때는 좀 더 느린 걸음으로 몇 번 고개를 돌려 살피곤 했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초콜릿이나 과자 빵도 아니고 채소를 향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헤아리기를 바란 건 당연히 무리였다.      

 

아줌마가 된 지금도 이런 정서가 내게 흐르나 보다. 여름은 단연 초록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식탁에 올리는 일은 여름날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바라면서도 잘 보내야 하는 내게 위안이었다. 이 초록들이 어색해질 무렵이면 여름도 끝날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사이 어느 농부의 밭에서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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