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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ug 24. 2022

포도 흥정

노점 아줌마와 짧은 대화 그리고 생각들



아침 일찍 남편과 산책을 다녀왔다. 집에서 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숲을 찾아가는 길에는 포도밭들이 제법 있다. 한여름을 지나 포도가 한창인 시절에는 곳곳에서 노점이 생긴다. 바로 옆 포도 과수원을 하는 농부들이 팔 요량으로 간이 판매장을 마련하는 까닭이다.   

  

아이가 지난주부터 샤인 머스켓 얘기를 종종 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마트에 갈 때마다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삼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은 왠지 부담스럽다. 다른 것을 살 때는 그냥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왜 이 포도 가격 앞에서는 그런지 모르겠다. 포도는 포기하고 복숭아를 몇 주째 먹는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에게 빚진 기분이다.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포도 한 상자를 사고 오면 될 것을 결심하지 못하는 일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러다 아침에 샤인 머스켓을 파는 농장을 만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시간 정도 정자에 앉아 쉬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그곳에 들렀다. 가격은 마트와 비슷했다. 복숭아나 다른 과일은 가게마다 가격이 다른 데 비해 이 포도는 평균을 유지하는 모양이다. 카드를 꺼냈다. 그러자마자 아주머니가 한마디 한다.

“우리 카드 안 받아요. 카드기도 없고요. 현금이나 송금해줘요.”

차 안에 있는 남편에게 달려가 돈을 달라고 했다. 남편이 불쑥 한마디 던진다.

“한 송이 더 붙여 달라고 해봐. 여기서 농사지은 거니까.”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말을 듣고 보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더해지면서 용기도 생겼다.

“아줌마 포도 한 송이 더 주시면 안 돼요. 여기 보니까 마트랑 가격도 똑같고요. 전 직접 농사지은 거니까 쌀 거로 생각했는데….”

아주머니가 아무 말 없이 포도 한 송이를 상자에 위에 올려놓았다.    

포도 과수원에서 산 샤인 머스켓

  

얼떨결에 포도 두 송이를 얻었다. 좀 전에 남편에게 돈을 가지러 가기 전 흥정 과정에서 한 송이를 얻어 두었다. 상자 안 비닐에 포장된 것처럼 상품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먹기에는 손색이 없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침부터 내게 행운이 찾아온 듯하다. 집에 와서 상자에 놓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포도알 몇 개를 씻어서 남편과 함께 먹었다. 달콤하고 아삭하며 부드럽다.      


그러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와 오일장에 갔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가끔 방학 때면 엄마와 동행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엄마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다정하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적극적인 아줌마로 변했다. 생선이나 과일을 살 때면 시장 상인과 제법 흥정에 나서는 모습을 종종 봤다. 가격을 깎는 일은 다반사였다. 때로는 복숭아나 사과 등 과일 하나를 다시 비닐에 날쌔게 집어넣었다.

“아이 아주머니 그러시면 안 돼요. 그게 얼마인지 아세요.”

아저씨의 급한 목소리에 내가 살짝 긴장하는 순간 엄마가 거든다.

“아니 사장님 여기 자주 오는 단골인데 하나 더 줘요. 다음에도 또 올게요.”

엄마의 얘기를 들은 아저씨는 별말이 없다. 암묵적인 허락의 의미다. 

“엄마 아까 왜 그랬어? 창피하게. 그거 안 되는 거잖아.”

가게를 벗어나며 엄마에게 말을 건네면 아무런 말이 없다. 

지금 내 모습의 그때의 엄마와 비교하면 행동의 정도는 약하지만 얼핏 보면 비슷했다. 엄마에게서 배운 걸까? 아니면 남편의 한마디가 잠자고 있던 나의 흥정력을 깨운 것일까?      


집에서 오후를 보내다 문득 샤인 머스켓을 사는 과정은 타인과의 대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일을 사는 짧은 시간이 대화일 수 있는 건 내 마음을 솔직히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에게 왜 그 포도를 사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당연히 저렴할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가격은 내릴 수 없다는 아줌마의 말을 듣고 한 송이 더 주면 구매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그때 내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하는 주저함이 없어서 좋았다.  

    

누군가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한번 곱씹어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대화를 막는 장애가 된다. 상대방을 향한 불안과 쌓아 두었던 불만 등이 더해져 말을 건넨 이후의 상황을 염려하면서 꺼내놓지 못하는 상황으로 달려간다. 포도를 판매하는 아줌마가 처음 만난 타인이기에 조곤조곤 사고 싶지만 비싸다는 느낌을 적절히 표현한 듯싶다. 아주머니 역시 아침 마수걸이였다. 컨테이너로 된 작은 가게에는 빨리 팔아야 할 포도 상자가 꽤 많이 쌓여 있었고, 현금이 오가는 일이라 시식용으로 꺼내놓은 포도를 전하는 일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포도를 사기까지 과정은 가끔 일상에서 부딪히는 갈등 상황과 비슷했다. 어떤 것을 원하지만 선뜻 실행해 옮기지 않는 것. 때로는 그것이 게으름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 현실의 장벽이라고 단정 짓고 가슴속 먼 곳에 내버려 둔다. 계속 풀리지 않은 것이기에 답답해하면서도 잊으려 하고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것. 그렇게 지내는 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어버리기도 한다. 몇만 원의 포도 가격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럴 테지만 그럼에도 한 번 도전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나도 몰래 나를 억누르는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서 놓여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답보 상태라 하더라도 직면해 보는 것만으로도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마트에 같이 다녀온 남편은 포도를 보며 흐뭇해한다. 

“우리가 오늘 샤인 머스켓 잘 샀어. 저렴하게.”

동네에 보니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남편은 덤으로 얻은 것도 있으니 뿌듯해한다. 그보다 난 더 많은 것을 배운 하루였다. 포도를 사는 짧은 시간에 내 얘기를 잘 전달했다는 기분이 그랬다. 혼자만 아는 가볍고 즐거운 감정에 마음이 가볍다. 엄마의 오일장 흥정은 삶을 위한 위험을 무릅쓴 열정적인 행동이었다. 엄마처럼 과감해질 자신은 없지만 내 방식대로의 말을 건네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물건을 살 때 적절히 협상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과정은 매력적이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다른 일에도 조용히 퍼져나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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