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Aug 26. 2022

순댓국 한 그릇

동네 국밥집으로 향했던 강한 끌림



저녁부터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선선하다. 어제 오후까지도 에어컨을 틀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리도 달라지니 당황스럽다. 그러면서도 역시 가을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기쁘다.  이번 여름은 무더위보다는 높은 습도에 힘들었다. 마룻바닥을 걸을 때면 찐득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집안 곳곳이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이럴 땐 몸이 이상하게도 열이 나는 것처럼 힘들어한다. 온몸 곳곳에 쌓여있는 스트레스 군단이 힘을 내어 나를 압박하려 한다.     


해야 할 일은 쌓여있고 몸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을 때 거실에 있는 돗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대나무의 시원한 기운이 등을 중심으로 해서 온몸에 퍼져나가면 편안해진다. 혼자 빙글빙글 돌며 어쩌지 못해 있다가 잠깐 잠이 들 때도 있다. 대부분은 넋 놓다 벌떡 일어나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었다. 먹구름이 잔뜩이고 기온은 적당히 높은 날에는 이상하게도 끌리는 음식이 있다. 바로 순댓국. 뽀얀 국물에 여러 가지 내장 부위가 적당히 들어가고 순대 몇 개가 들어가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동네 국밥집으로 향했다. 11시를 조금 넘긴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식사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세 번째 가보는 식당이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아주 훌륭하진 않지만, 기본은 되어 있다는 정도. 큰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어서 가끔 생각났다. 그러다 이날은 절실히 그것을 먹고 싶었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에 국물을 한 숟가락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일을 마쳐야 하는 정해진 기간과 지금까지 흘려보낸 시간, 그리고 남아있는 며칠을 헤아리며 달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급해진다. 이날은 더는 진전이 없다고 단념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의 허기짐 때문인지 뭔가를 먹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떠올린 순대국밥이었다. 식당에서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포장하고는 집에 와서 뚝배기에 넣고 푹 끓였다. 순댓국의 독특한 냄새가 부엌을 중심으로 거실까지 퍼져나가며 이제 먹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다.      


텔레비전을 켜고 리모컨을 들어 마음에 드는 채널을 고정했다. 열심히 후후 불며 열심히 먹었다. 얼굴을 중심으로 땀이 조금씩 흐르는 것 같더니 온몸으로 번져간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릇이 비었다. 허기진 마음에도 온기가 돈다. 더운 날 시원한 걸 찾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오히려 제 역할을 해내는 건 뜨거운 국물이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기쁨이 찾아온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진행하는 일을 잘못하면 어쩌지 하고 불안하던 마음도 잔잔해졌다. 딱 한 시간 정도의 행복이었다. 다른 무엇도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할 때 순댓국 한 그릇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무기력해진 몸을 이끌고 나가서 검정 비닐에 사 들고 온 만큼 의욕이 살아났다.


올여름에는 순댓국을 두 번 먹었다. 정말 스트레스가 최고에 달하고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 나를 일으키기 위해 이것을 찾았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강하게 이끌었을까? 그건 아마도 처음 먹었던 날의 감정 때문이었다.    

 

순댓국을 먹은 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회사 생활을 할 때였다. 한창 직장 상사와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던 나는 사표를 써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요일 친구를 만나 어느 작고 허름해 보이는 식당으로 향했다. 친구는 겉모습은 이래도 맛있는 식당이라고 안내했다.      


주인장이 직접 만든 순대에 여러 가지가 들어가 있었고, 건더기가 많은 순댓국이었다. 처음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첫술을 떴는데 너무 맛있었다. 족히 30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진심 어린 맛이 손맛이 기억난다.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그 식당이 자꾸 떠올랐다. 얼마가 지나 친구에게 그곳에 가자고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의외였다.

“그 식당 헐렸어. 주인이 그곳에 새 건물을 짓는다고 세를 주었던 식당은 당연히 문을 닫게 되었고. 그 후로는 나도 어떻게 됐는지 몰라.”

너무나 아쉬운 소식이었다. 고향에 있던 그 식당은 집에 갈 때마다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결국 가지 못하고 추억으로만 남았다.     


뜨거운 국물이 생각나는 날이면 그 집 순댓국이 생각났다.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다가오는 시원함과 꽉 차오르는 포만감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그것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그 집 맛이 그리웠다. 여름날 내가 열심히 하는 길밖에 다른 탈출구가 없을 때 순댓국이 나를 버티게 했다.     


음식을 먹는 일은 기억의 한편을 소환해 내는 과정이다. 열정 가득한 20대 시절, 고민도 많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일이 마음처럼 안 풀리는 날이면 두려움 없던 그 시절 내가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포기와 시작이 함께 어울려 다시 무엇을 할 힘을 동시에 얻는 일이 가능했던 때였다. 

 

살아가는 일이 힘들 땐 누구에게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족이거나 친구일 수도 있지만 한 그릇의 음식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가 흘러 순댓국이 또 떠오르는 날은 내게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려야겠다. 그 시간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도 흥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