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과 이별하기
봄이 오면 마음이 바빠진다. 그동안 묻어두었던 집안 곳곳을 한 번은 정리하고 지나야 할 것 같다. 점심 약속이 있었지만 서둘렀다. 그곳에 무엇을 두었는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책장 아래 서랍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몇 년 전에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했던 것이 투명 파일에서 나온다. 지금은 너무 커버려서 이럴 때가 있었을까 하고 한참이나 바라보게 되는 아이들의 사진도 몇 장 발견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한참이나 헤매던 교보문고에서 샀던 아트 엽서도 찾았다.
그곳에는 지나간 내 시간들이 있었다. 한국사 능력시험에 도전한다고 기본기를 익히기도 전에 준비했던 문제집도 깨끗한 채로 그대로다. 글을 쓰기 위해선 맞춤법이 기본이 돼야 한다는 마음에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켰던 두꺼운 그 책도 있다.
빵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가끔 헌책방에서 사두었던 책도, 여성잡지 속 베이킹 레시피가 담긴 얇은 부록도 보였다. 한동안 좋아했던 CD며 성당에서 세례 받던 날 풍경이 담긴 사진까지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다 모였다.
읽지 않는 책들, 나중에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곳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그때와 지금의 마음의 간극은 너무나 커서 필요성이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이 비닐 가방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순간 3개의 큰 시장바구니가 꽉 찼다.
한번 들어보니 무게가 상당하다. 처음 이 공간에 이 것들을 하나씩 꽂아두었을 때는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며 꼭꼭 문을 닫아놓고 보관했다. 그렇지만 한두 번도 살펴보지 않았던 자료였고 기록이었다.
그때에 한 번 더 읽어보면 좋았을 것들이다. 그동안 살펴보지 않았다면 내게 의미가 없는 것이란 얘기다. 무엇이 그토록 이것들을 저장하게 하는 마음이 일었을까? 미뤄두는 습관과 연결되지 않았나 싶다. 그 너머에는 내일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무언가 준비해야겠다는 불안감과 노력해야 한다는 두 감정이 함께 얽혀있었던 것 같다.
깜깜한 공간 안에 갇혔던 책과 자료가 세상을 경험하는 아침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설렘과 기대의 빛을 잃은 지 오랬다. 가방을 들어 엘리베이터를 두 번 오르고 내렸다. 양손에 힘을 주고 낑낑대며 재활용 수집장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내 앞에 있을 때 잘 읽어보고 기록하자. 혹여나 시간이 없어 불가능하다면 2~3일 내로 해결하지 않은 물건일 경우에는 과감히 거리를 두자. 어느 비어있는 공간에 터를 잡는 순간 이미 나와의 이별은 예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 안 곳곳에 이렇게 큰 목적을 갖고 자리 잡고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들과 과감히 헤어져야 할 봄인 듯하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한동안 나를 기다릴 내 물건들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