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모임에 대해
한 달 만에 만났다. 아이들 유치원시절 알게 된 엄마 5명이 모인다. 한 이는 새롭게 일을 하게 되어 자리를 비웠다. 어김없이 새로운 달이 되면 총무를 맡은 엄마가 만날 장소와 날짜를 묻는 메시지를 보낸다. 단체대화방에 모두가 원하는 날짜를 알려주면 가능한 날을 정하는 형태로 매번 얼굴을 마주한다. 코로나가 심했던 동안은 가끔 카톡을 통해서만 만났다. 그러다 상황이 좋아지면서 3월부터 본격적으로 만났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저 반가웠다.
같은 동네에 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에 특별한 이슈가 없어도 시간은 잘 지난다.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고, 그동안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 얘기까지 이야기의 주제는 끝이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모임을 다녀오면 괜스레 마음이 허해진다. 가서 무얼 했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얘기하는 이의 상황을 그려보거나 공감하기 위해 조금 신경을 써서 그런가 보다.
어느 날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모임 나갔다 오면 너무 지치고 그래. 별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엔 가지 말까?”
“뭐 그래. 그래도 나가봐. 여러 이야기 듣고 오잖아.”
동생에게도 물었다.
“나 있잖아. 모임 나가는데 별 재미가 없네. 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왜 나갈까?”
“언니 사람들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뭐 그리 특별한 이야기를 나눌까. 언니랑 나랑 얘기 나누는 정도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
한번 나갔다 오면 고민이 생긴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망설여지다가도 또 모임이 나갔다. 또 다른 그림책 모임에서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림책을 가져와서 읽고 느낌을 나누었는데 언젠가부터 책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도 만나고 오면 혼자 잠깐 멍해진다.
누군가를 만날 때 가지는 목적의식은 뭘까? 내가 사람들에게서 얻고 싶은 건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사람들은 만나도 자기 얘기를 안 해. 그냥 주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아이들 남편 말고 자기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사람들과 관계 맺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꺼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그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등이었다. 그들의 삶의 풍경을 알고 싶었다.
어느 날은 함께 모임을 하는 이에게 꾸준히 이어지는 비결이 뭘까를 물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서로를 배려하고 마음결이 예쁜이들이잖아요. 그거면 된 것 같아요.”
그 순간 “맞다”하고 무릎을 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는 두 곳의 모임에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다. 누구의 마음이 상할 이야기는 오가지도 않고 불편을 주지 않는다. 이 또한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들이니 모두가 괜찮은 심성의 이들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물음표를 던지다 보니 스스로 얻게 된 답이 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보통은 자기에게 집중보다는 눈에 보이거나 스치는 것, 옆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것이 편리할 수도 있고 그동안 얻은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간단하지만 어렵다. 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하고 지나버린다. 때로는 좋은 일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면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걸 누구에게 감히 꺼내놓을 수 있을까 헤아려보니 어려운 문제다.
그러고 보면 휴대전화 문자보다는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고 소리를 내어 얘기하고, 밥 먹는 것 자체가 대화다. 꼭 말을 해야 하는 게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먼저 꺼내놓으면 된다. 그 역시 내가 망설이는 지점인데 타인에게 강요하는 꼴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면 그의 그동안 생활이 잠깐 스쳐 지날 때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즘은 그런 일상을 나누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시대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