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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y 18. 2023

생크림 폭발 케이크

첫 마음을 유지하는 어려움

케이크 만들기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오븐을 친구 삼아 일주일에 한두 번 새로운 빵 세계에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돌아오는 남편 생일 케이크는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집을 비워야 하기에 며칠 일찍 서둘러 케이크를 준비하고 가족끼리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의 겨울과 봄 편에 나온 주인공 이치코가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면서도 꼭 한 번은 만들고 싶었다. 흑미와 단호박을 넣은 케이크는 두 가지 색의 어울림이  인상적이었다. 생크림을 바른 긴 사각형의 단아함 또한 오래 기억되었다.      


아침부터 혼자 바빴다. 운동 가기 전 흑미를 물에 불려놓았다. 집에는 단호박이 없다.  호박 같은 노란 빛깔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은은한 달콤함은 뒤지지 않는 밤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냉동실에 있던 밤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집으로 돌아온 다음 흑미는 죽처럼 은근히 끓이고 밤은 껍질을 벗겨 졸였다.

    

세탁기에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케이크 재료를 준비했다.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오전이 훌쩍 지났다. 새벽에 일찍 깬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40여 분을 자고 일어나 보니 바깥 날씨가 한여름처럼 후텁지근하다. 케이크에 대한 의지가 조금 작아진다. 동시에 살짝 후회했다. 동네 빵집이라는 편한 길이 있는데 굳이 왜 이리 돌아서 갈까 싶다.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빵을 미리 구워놓을  계획이었다. 설탕을 넣고 조린 밤과 블렌더로 간 흑미에 냉장고에 있던 버터도 꺼냈다. 파운드케이크를 만들 때처럼 베이킹파우더와 중력분, 달걀, 우유를 눈짐작으로 계량해 두 종류의 반죽을 만들었다.      

생크림 폭발 케이크

늦은 오후로 접어들수록 잘 만들고 싶은 마음 대신 빨리 끝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이런저런 복잡한 기분 때문인지 판단이 흐려졌다. 밤이 가득 들어간 무거운 반죽을 먼저 놓고 그 위에 흑미 반죽을 올려야 하는 데 반대로 해버렸다. 빵은 생각보다 잘 부풀어 오르지 않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비장의 무기 생크림을 잘 바르면 모든 게 잘 마무리될 거라 믿었다.      


저녁을 먹고 휘핑크림을 핸드블랜더로 돌려 생크림을 만들었다. 설탕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 넣고는 단단한 크림을 완성했다고 한시름 놓을 때였다. 순식간에 그릇을 꽉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면서 사방으로 생크림이 튀어 나가는 폭풍이 일었다.     


식탁 주변 바닥은 물론 이곳저곳에 생크림 비가 내렸다. 눈 깜짝할 시점이었다.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막내가 한마디 거든다.

“엄마, 괜찮아. 긍정적인 생각. 닦으면 되잖아.”

이 말에 화라는 녀석이 찾아오려는데 딱 멈춰 섰다. 우선 생크림을 냉장고에 두고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물티슈와 걸레, 휴지 등으로 바닥을 대여섯 번 닦았지만 크림 냄새가 진동한다. 심지어 손소독제를 묻혀서 청소했지만 말끔한 느낌은 없다

.     

내 바지의 절반도 크림 범벅이다. 대충 주변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파운드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동영상으로 익혀둔 방법도 쓸모가 없다.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은 기분에 작은 스크래퍼로 손 가는 대로 크림을 더했다. 정말 예쁘게 완성하고 싶었던 케이크는 흡사 어느 추상화가의 거친 붓질을 연상시킬 만큼 투박했다.      

그래도 화룡점정으로 청포도와 얇게 썬 사과 몇 조각을 올렸다. 생일케이크인데 화사해야 분위기가 살 것 같다. 남편과 큰아이가 오면 함께 앉아 축하 노래를 부르면 그런대로 마무리되겠다고 생각했다.     


10시 즈음 케이크를 꺼내어 접시에 잘 놓으려는데 신의 장난처럼 또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그땐 망했다는 기분이 들만큼 절망적이었다. 다행히 케이크가 담긴 그릇 뚜껑이 잘 닫혀 있어서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했다. 다시 모양을 잘 만들기도 힘들었다. 대충 살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남편과 아이가 괜찮다는 말로 위로한다. 별 도움이 안 되는 얘기였다. 초에 불을 켜고 생일을 축하했다. 남편은 애썼다는 말을 남겼지만 별 느낌이 없다. 평소에도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기에 그냥 넘겼다. 뭐라고 할 기운도 없다.      


내가 좋아서 한 일에 다른 이의 반응에 크게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여러 갈등에서 자유롭도록 하는 나만의 처방이다. 혼란이 겹겹이 쌓여가는 날에도 이런 감정을 유지하는 내가 신기했다. 별말이 없는 남편을 슬쩍 보니 케이크를 후다닥 먹는다. 먹는 일에는 무엇보다 솔직한 그였기에 맛은 나쁘진 않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아이들은 고급스러운 맛이라고 칭찬했다. 케이크를 조금 맛보니 흑미와 밤이 들어가서인지 쫀득하면서도 부드럽고 담백하다.     


처음 가졌던 뜻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케이크를 만들며 절감했다. 시간을 나누고 단계마다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롯이 내가 자율적으로 계획한 일이었음에도 예상에도 없던 사건 앞에서는 당황스러워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크림이 화산재처럼 부엌 안에 휘날렸던 건 중간에 끼어든 귀찮음이란 감정 때문이었을까? 하루가 지나니 진정이 되었다고 여기면서도 잔재는 얼마간 계속될듯하다. 여전히 손에선 생크림 특유의 끈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부엌 바닥은 좀 미끄럽고, 우유 냄새가 느껴져 며칠 동안 카펫을 깔기로 했다.     

 

아쉬움이 많은 케이크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를 잡아준 아이의 한마디는 또 다른 공부였다. 벌어진 상황을 낙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고 해결하려는 마음, 그건 긍정적으로 바라보기였다. 십오 년 전쯤 큰아이의 생일에 만들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이어 두 번째 케이크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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