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성적표
도서관에 간 아이가 놓고 간 게 있다고 갖다 달라는 연락이 왔다. 공부하겠다는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게 엄마다. 얼른 아이 방으로 가서 물건을 챙기고 도서관에 가서 건네주었다. 여유 있게 공원을 돈 다음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교회 꽃밭에 분홍 철쭉꽃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그곳을 지나면서도 꽃이 피었는지도 몰랐다. 그 옆에 있는 붉은 철쭉꽃이 화려하던 5월 어느 날 만 기억되었다. 지금 피어 있는 그것도 그때 함께였다고 여겼다.
여름으로 달려가는 즈음에 그 꽃이 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주변의 다른 꽃들은 이미 시들어 언제 꽃이 피었냐는 듯 초록의 잎사귀만 무성하다. 무더기 핀 꽃은 초록들 가운데서 단연 빛났다. 모두가 잊고 있던 어느 날에 피었을 것이다. 엄마가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한 법이다. 그러니 기다려라 서두르지 말고.”
엄마가 말한 속담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언제나 맨 처음 앞서 나가는 이에게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이 격언은 누군가의 찬사를 받지 않더라도 가다 보면 제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과 위로다.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그리 바라보면 이 순간 어렵다고 여기는 것들도 그런대로 괜찮게 흘려보낼 수 있는데’ 하며 나를 다독였다.
내 마음이 아주 시끄러웠던 한 주였다. 아이의 1차 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3일간 이어진 시험 기간에 아이는 한 번도 웃거나 시험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오후에는 가장 무표정한 얼굴로 두문불출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시험 때 가장 힘든 사람은 시험을 치른 이라며 결과를 묻는 것이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했다. 아버진 그의 철학을 실천하듯 시험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떤 말도 없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와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다”라는 응원의 한마디가 전부였다. 난 아이가 중학교 때 그 반대로 행동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묵언으로 일관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세월이 있기에 표정으로 읽어지는 부분이 있다. 예상컨대 시험을 잘 본 것 같지 않다. 단지 어두우면서도 아무런 느낌을 전하지 않은 얼굴에서 전해지는 그 깊은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시험이 끝난 날 아이에게 물었다.
“시험은 어땠어? 영어학원은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등학교 다 어렵지 뭐. 성적표 나오면 얘기해요.”
아이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짧은 답변에 더할 말이 없다. 5월 황금연휴를 보내고 수련회와 체육대회 등 학교에서 굵직한 행사가 지났다. 그동안 아이는 들떠있는 듯 즐겁게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엄마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걱정이 하나씩 쌓여가던 참이었다.
성적표는 그간의 근심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이의 치열한 성적경쟁의 현주소를 종이에 적힌 여러 숫자가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학원을 알아보았다. 학원에 가니 가장 먼저 묻는 건 등급이었다.
“몇 등급이에요?”
이건 학원에서만큼은 아이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학원의 목적에 가장 맞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씁쓸했다.
몇 군데의 학원을 돌아다니며 교육의 현주소와 아이가 처한 현실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벌써 낙담하기에는 어리석지만, 절대 만만치 않은 일이 성적을 올리는 일이었다. 가장 힘든 건 아이일 수도 있다. 다가오는 2차 고사에서 현재보다 향상된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대목이다.
이제야 핀 철쭉꽃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꽃 피는 시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시기에 꽃이 없다고 해서 이번 해는 건너뛰는 게 아니다. 나무의 상태에 따라서 뜻밖의 어느 날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를 일이다.
기다리다 늦게라도 꽃을 만나면 행복할 것이다. 설령 그 반대가 되더라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꽃나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을 보며 지금의 불안이나 걱정을 덮어버리려는 마음이 한데 섞였다. 꽃 없는 나무에서도 노랑, 빨강, 분홍의 화려한 색이 아닐 뿐 다른 형태의 꽃은 분명 존재하리라 믿고 싶다.
아직도 난 아이를 보면서 흔들린다. 지내다 보면 꽃이 필 거라고 믿고 싶은가 보다. 살아가면서 꽃처럼 누군가 한 번쯤 바라보는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먼저 살아나간 어른이라고 하면서, ‘너를 위해서’라는 포장을 하고 내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