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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Feb 24. 2023

설거지하며 영화 보기는…

부엌 생활 관찰

설거지가 재미있어졌다.  해야 하는 일이라서, 내가 하지 않으면 금세 정신없어 보이는 부엌이 싫어서 습관처럼 했다. 가족들이 밥 먹은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일이라고 하면 무게가 실리지만 여전히 거리를 두고 싶은 것 중에 하나다. 

       

여기저기 지저분해 보이던 그릇들이 말끔해지는 것을 볼 때 가끔 뿌듯했을 뿐이다. 하루의 시간 중 얼마나 설거지에 매달리고 있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설거지에 대해 돌이켜보니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것인데도 별 생각이 없었다.  


가사 노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보급되면서 변화가 일었다. 몸을 움직여 신경 쓰는 대신 기계에게 맡기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늘었다. 내 주위만 해도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고 있거나 갖고 싶다고 희망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난 아직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것을 들이기에는 부엌의 구조 때문에 대대적인 공사를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익숙한 대로 살아가는 게 편하다 여긴다. 그래서 설거지는 한참이나 내 손을 거쳐 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 내 설거지 생활에 변화가 일었다.      

“요즘 재미가 뭔지 알아? 넷플릭스 보면서 설거지하기야. 뭐랄까 가슴이 뛰기도 하고 하루 중 가장 에너지가 살아나는 상태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한마디는 내게 큰 흔들림이었다. 어떤 분위기인지 전해 올 정도로 친구의 얼굴이 빛났다.   

   

그때부터 종종 휴대전화를 싱크대 바로 앞에 세워 두었다. 한 손에 밥그릇을 한 손은 수세미를 들고 설거지하며 눈은 영화의 한 장면을 향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가득했던 접시와 그릇, 냄비가 하나둘 정리되었다.   


설거지가 이처럼 가벼운 적이 있을까? 이전까지는 그저 조금의 답답함과 피곤함, 그만하고 싶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강했다. 설거지는 보통 길어야 20분 정도면 끝이 난다. 싱크대 앞 영화 상영시간 또한 그만큼이다. 그릇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면 영화도 그 상태로 멈춘다. 


한편을 온전히 보지 않아도 괜찮다.  시끄럽다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달그락 소리와 함께 영화에 몰입한다. 눈빛으로만 반응하며 말보다는 열심히 듣는 나로 변신한다. 하루에 세 번 정도 이렇게 영화를 만나다 보면  평범한 한마디가 가슴에 와서 꽂힐 때가 있다.


“힘든 일은 원래 어려운 법이야.”

영화 <인스턴트패밀리> 한 장면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건네는 짧은 말에 울컥했다. 곱씹어 볼 필요 없는 분명하고 당연한 말이었다.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이 한 줄이 유행가 가사처럼 흘렀다.    

 

시끄러운 물소리와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효과음향 같다. 설거지하면서 영화를 만났다. 문득 영화를 보며 설거지하는 나를 본다. 그건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설거지하는 순간에도 어느 누구와 대화를 바라는 무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설거지를 미뤄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홀로 반복적인 동작을 이어가는 동안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방인 혹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다 휴대전화 속 영화의 한 장면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함께 머물러있다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안정감을 주었다.  


영화를 보면서 설거지가 특별한 즐거움이 되었던 건 여러 사람 속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영상 서비스를 구독했던 추운 겨울날부터 다가온 봄까지 싱크대 앞에서 난 수많은 배우와 대화했다. 대화는 꼭 누군가와 말하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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