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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Feb 16. 2023

‘바람의 노래’에서 만난 이타미 준

유동룡 미술관을 기억하며

아침부터 흐렸다. 겨울 기운에 숨죽인 작은 숲을 지나 유동룡 미술관에 도착할 즈음에 비가 내렸다. 한두 방울 두둑 내리더니 금세 우산을 펼쳐야 할 만큼이었다. 떨림과 긴장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금은 어둑어둑한 느낌을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건축가 이타미 준, 유동룡이 작업한 작품들에 대한 스케치 작업과 모형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이타미 준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속속들이 그의 일생과 작업을 살펴본 적은 없다. 미술관 전시실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가 지녔던 사유의 깊이를 미뤄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끝까지 유지하며 살았다. 그 속에서 견뎌야 했던 외로움과 어려움은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향해가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건축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 때문이었다.     


그는 외관, 모습에 집중하기 이전에 그것을 이루는 재료의 소재와 특징에 더 깊이 천착했다. 이곳을 방문하기 훨씬 전에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를 봤다. 그가 남긴 한국과 일본 등의 건축물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잔잔한 푸른 바다처럼 다가왔다.   

  

내가 이타미 준을 인식하게 된 건 방주교회를 만난 후였다. 자연 속에 머물러 있는 방주교회는 그동안 교회의 모습이라고 여겼던 상징적인 요소들이 모두 사라졌다. 건축가가 풀어낸 깊은 이야기는 모르더라도 그곳에는 절대자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다. 


잔잔한 바람에 일렁이는 물과 그 속에 반사되는 하늘의 풍경과 구름, 태양 빛에 온갖 복잡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서 만났던 수풍석 박물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 사이에서 풀어낸 그의 진한 고민과 통찰력에 감동했다.     

유동룡 미술관

그 후에  미술관에서 이타미 준의 세계를 오롯이 경험했다. 흩어져 있던 그의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살펴보며 한 건축가의 일생을 관통했던  철학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축은 건축가의 시선으로 공간에 세상을 그려내는 구체적이고 심오한 작업이라고 나름 정의하게 되었다.    

  

기존의 것들을 외면하고 다시 새롭게 세우기보다는 과거의 것과 공존하려는 노력, 그건 아마 자연과 세상을 향한 그의 마음이 아닐까. 그나마 내가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그가 남긴 제주의 건축물에는 그런 요소가 잔잔히 배어있다.     


억새가 춤추고 현무암이 함께하며, 야생화가 이곳저곳 있는 그곳에 변화를 우선하기보다는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조화와 새로운 발견이라는 요소를 적절히 어우러지게 했다. 낯설지만 그 속에서 안겨있는 게 그의 건축물이었다. 이런 그의 작업이 미술관에서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이란 주제로 시대와 주제, 공간별로 나뉘어 사람들을 만난다.       


미술관에서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것 외에도 더 감동했던 건 차를 마시는 티 라운지에서였다. 관람 후에 입장권으로 아트 엽서나 차를 마실 수 있는데 우리 가족은 차를 선택했다. 이타미 준은 평소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일상의 모습을 따랐다는 티 라운지 ‘바람의 노래’에 머물렀던 짧았던 시간은 강렬했다.      


비 오는 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잔은 건축가 이타미 준이 풀어내려는 건축에 대한 정서를 오감으로 경험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설명하듯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그니처 티와 다기, 녹차 초콜릿 한 조각의 여운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바람의 노래’를 표현한 시그니처 차는 녹차에 박하와 청보리 순, 조릿대를 블랜딩 하여 만들었다. 순수 제주산 차로만 만들어진 그것은 본질적인 것들에 겸손하게 다가갔던 건축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지 않나 싶다. 차는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동안 열심히 들여다본 전시를 압도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 역시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온 듯했다. 울퉁불퉁한 제주돌들과 야생의 나무와 식물이 마음대로 자리 잡은 곳. 그 속에 미술관이 머물러 있었다.      

바람의 노래 티라운지 시그니처 티 

미술관에 가면 보는 것과 그로 인해서 다가오는 느낌들에 집중하려 한다. 그 작업은 즐겁거나 때로는 지치고 답답함 같은 게 얹어질 때도 있다. 이타미 준의 작업을 살피면서도 어렵게 다가오는 것들이 상당했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불편함은 바람의 노래를 표현한 차 한잔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스산한 날 제주의 향기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따뜻한 차. 그 속에서 이타미 준을 마주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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