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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y 07. 2023

비 오는 날  들기름막국수

초록 파가 더해져 아름다운 한 그릇

비가 내린다. 가뭄으로 비에 목말라했던 터라 반가웠다. 어린이날이지만 특별히 어디를 간다는 계획도 없다. 아이가 조금 컸다는 것과 모두가 각자의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계획을 잡기가 어려웠다. 가까운 곳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점심은 해결했지만 저녁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밖은 엄청 비가 쏟아진다. 일 년 가까이 이런 비를 만나지 못했다. 비는 언제나 땅에 빗물이 흐르는 만큼 내리는 것이 정석이라 여겼다. 그동안은 그게 아니었다.      


밖에 우산을 쓰고 나가는 일이 꺼려질 만큼 쏟아진다. 언제가 봤던 바짝 마른논에 충분히 축여질 정도다. 비 오는 날은 매일 먹는 밥보단 다른 걸 먹고 싶어 진다. 어릴 적 아버진 멸치국수를 즐겼다. 푹 끓인 육수에 굵은 면, 적당히 신 김치와 함께였다. 특별히 올라간 고명도 없다. 단골로 국수 그릇에 오르는 건 집에서 키운 쪽파나 양파, 호박 정도였다.     

 

국수를 떠올리다 막국수가 생각났다. 어느 날엔가 아이가 들기름 막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메밀면은 집에 있고 육수도 필요 없다. 정말 간단하다. 그런데 문제는 초록이 문제였다.     


메밀에 초록이 있어야 맛이 살아날 것 같다. 남편은 그냥 먹어도 괜찮다며 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지나는 말로 거들었다. 그건 음식을 만들지 않는 이의 자연스러운 한마디지만 내겐 아니었다.   

비 오는 날 들기름막국수

초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으니 그것 없는 음식을 내놓아도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 먼 길도 아니기에 나갔다 오면 되는 일인데 왜 이리 망설이나 싶었다. 우산을 들어 동네 마트로 갔다.   

  

집안에서 바라보는 비보다 밖에서 느끼는 빗줄기는 가늘었다. 지나는 사람이 없는 동네 길에는 어디선가 아카시아 꽃향기가 밀려왔다. 저 멀리 작은 숲에는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었다. 매일 지나면서도 몰랐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 원을 주고 실파 한 팩을 사 왔다. 면을 삶고 간장에 설탕과 들기름을 적당량 넣은 소스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조미김을 넣기도 하지만, 집에 없던 터라 돌김을 구워서 부셔 넣으니 담백했다. 그릇마다 면을 놓고 김과 파를 올린 다음 소스를 더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막국수는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춘천 소양감댐 옆에 있는 막국숫집에서 첫맛을 봤다. 초저녁이었지만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바쁜 길이었기에 빨리 먹고 일어섰다. 그럼에도 달짝지근한 고소함이 2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만든 막국수 역시 괜찮았다. 비의 비릿한 냄새를 날려버리며 들기름의 고소함이 오래 머물렀다. 여기에 간장소스의 달콤함이 어울리니 가라앉았던 저녁이 가벼운 댄스음악을 드는 것처럼 즐거웠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먹었다. 그만큼 맛있다는 의미였다. 파가 없는 막국수는 어떠할까 생각했다. 그건 팥소가 없는 단팥빵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파의 스치는 매콤함과 아삭함이 초록빛 한 그릇을 완성했다.   

  

음식은 언제나 노력과 정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손을 거쳐야 먹을 수 있다. 떠오른 것을 실천했다. 하루 중에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흘려보낸다. 상황상 하기 어려운 것이거나 귀찮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보려 하지 않고 기분이나 마음일 뿐이라며 무시한다.      


밥 먹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나를 깨운다. 비 오고 휴일이라는 이유로 일상의 많은 것들을 내버려 두었다. 무엇을 하지 않는, 멈춰버린 하루에서 나를 살아나게 했다. 답답했던 가슴속이 시원하다.     


쪽파를 사러 간 잠깐의 외출은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감상할 기회를 주었다. 바지끝자락이 살짝 비에 젖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빗속에 사 온 송송 썰어진 파는 들기름 막국수를 빛나게 했다. 당연하지만 행하는 것이 변화를 이끌고 기분 좋게 한다. 그것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 하루가 지난 지금 들기름막국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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