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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05. 2023

애호박 전 한 장

원하는 것을 바로 해 보는 것

동네 공원을 도는데 친구가 유명 강사의 특강 내용을 얘기했다. 아이들은 자신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할 때 마음이 아프고, 엄마가 기뻐할 때 행복하다고 했다. 


아침에 들었음에도 가물가물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정의였다. 어떤 일을 할 때 즐겁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만큼 빠져드는 일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해가 보이는 맑은 날이다. 서둘러 장을 보기 위해 마트로 갔다.  수목 깜짝 세일이 정기적으로 이어지는데  애호박이 두 개에 990원이었다. 평소의 절반 가격이다. 호박을 두 개만 들었다가 언제나 즐겨 찾는 것이어서 네 개를 사 왔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고 오니 점심시간이다. 아침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그것 때문인지 허기짐이 없다. 가볍게 지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점심을 건너뛰려고 했다. 식탁 위에 놓인 애호박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다른 어떤 것이 들어가지 않은 애호박만을 느끼고 싶었다. 한편으론 무언가를 만드는 게 나름의 정성이 필요하기에 그냥 지날까 망설였다.      


아침에 들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야겠다는 요즘의 생각과 맞닿은 얘기였다. 아무리 고민해도 실천 없이 가능한 건 없다.    


애호박 반개를 흐르는 물에 씻고는 채 썰었다. 아주 조금 밀가루를 더해 전 한 장을 부치기로 했다. 달걀이나 양파나 다른 것 없는 애호박 전을 만들었다.  

   

접시에 펼쳐 놓고 천천히 먹었다. 애호박이 달콤했다. 기름에 익혀서 그런지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연두의 껍질과 연한 노란 속살은 수줍은 아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더도 말고 딱 한 장이었으니 먹는 시간 역시 순간이다. 가볍지만 기분 좋아지는 일이었다. 친구의 말을 전해 듣지 않았으면 귀찮다는 이유로 다음으로 미뤘을 것이다.     


삶의 지혜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들을 때는 감탄하다가도 생활 주변에 머물지 않으니 날아가 버린다. 나를 위하는 건 내가 바라는 것을 찾고 움직여 경험하는 일이다. 


아무도 내게 시선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하는데 타인이 대신해 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애호박 전을 만나서 기뻤다. 장맛비가 잠시 어디론가 사라진 날에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무관심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바로 해 보는 것. 나로 서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것부터 출발했다.     


여름은 자연이 준 색이 스며든 채소와 과일을 촉촉하게 느껴보기 좋은 계절이다. 내가 원할 때 자신에게 내어주어야 다른 이에게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편안하고 담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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