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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ug 23. 2023

여름 기억하기, 자두청

시간 벌기와 잊기

자두가 남아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김치냉장고에서 아침 준비를 위해 채소를 꺼내다가 통 하나가 들어왔다.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아차 싶은 마음이 들면서 혹시나 하는 걱정이 일었다. 썩었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처음보다 색이 붉고 진했다. 통에 자두를 넣으면서 종이 행주를 깔아서 습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침을 준비하는 중에 식초 물에 담갔다가 씻었다. 잼을 떠올렸지만 아삭한 과육맛이 사라져 별로였다. 지난번에 청을 담가서 여름내 쫄깃하고 달콤한 자두를 즐겼다. 남은 것 역시 청으로 정했다. 요란했던 아침이 지나고 자두를 하나씩 얇게 썰었다. 


자두 하나를 들어 가운데를 중심으로 칼집을 살짝 낸 다음 양손으로 비틀듯이 힘을 주면 두 조각으로 나뉜다. 다시 씨를 빼내는데  거듭할수록 재밌다.  양푼에 자두 조각이 쌓이기 시작한다.   

초록 채소가 가득했을 때와는 다르다. 과일이 지닌 달콤함과 예쁜 색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 자두산을 이루어 가는 게 예쁘다. 


썰 때마다 한 조각씩 입으로 가져갔다. 시큼해서 절로 얼굴을 찡그린다. 그래도 다른 것 하나를 들면 기대가 살아난다. 다시 한 조각을 맛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다. 

    

도마를 식탁에 올리고 자두를 써는 동안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연을 가장한 행운을 바랐나 보다. 자두의 무게를 재지 않았으니 설탕양도 내 마음이다.     


손으로 조물 거리고 다시 한번 설탕을 부어주었다. 어느새 하얀 설탕은 자두 속으로 녹아들어 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소독한 유리병 세 개와 사각 유리통에 청이 담겼다. 


여름 과일로 청을 담그는 일은 자두가 마지막일 듯하다. 자두를 사던 날, 싼값에 상당한 양까지  횡재한 기쁨이었다. 불과 몇 분 후  별로인 맛에 실망하고 먹을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그리고 자두 중 일부는 후숙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일을 기약하며 남겨두었다.     


다른 일에도 마찬가지다. 종종 여러 가지를 잊고 지낸다. 누군가는 그래서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지만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자두도 7월 중순 어느 날에는 고민이었고,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자두가 고마웠다. 자두가 썩었다면 후회가 밀려와 우울한 아침이 되었을 일이다. 자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한여름 무더위를 버텨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은  얼굴을 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두처럼 눈앞에 있는 문제를 시간이 허락한다면 거리를 두고 놔둔다. 그때마다 항상 “생각해 보자”라는 단서를 달지만 절박하지 않은 일들은 그냥 지난다.     


자두 청을 만들며 주변을 살폈다. 냉장고에서 자두를 꺼내고, 자두를 썰며, 일상이 촘촘해지는 법을 잠깐 고민했다. 수박보다 자두로 기억되는 여름이다. 자두청을 꺼낸 가을 어느 날이면 지난 계절을 보내고 티클만큼이라도 나아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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