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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08. 2023

제주 그린레몬 그리고 케이크

정서적으로 연결된 과일을 만날 때

 

레몬 세 개를 샀다. 오래전부터 레몬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지만, 레몬을 장바구니에 담지는 않았다. 동네 마트나 노점에서 파는 레몬은 전형적인 노란색을 띠기는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외국에서 온 레몬은 어디에서 나서, 언제 마트에 왔고, 머문 시간은 얼마나 됐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미 수입 농산물을 많이 먹고 있음에도 레몬에 대해선 엄격했다. 레몬이 담긴 바구니 앞을 지날 때면 나조차 이해되지 않았지만, 매번 이런 감정이 지배했다.    

 

할인 소식을 알리는 로컬푸드 전단이 현관 우편함에 놓여있다. 오랜만에 그곳에 갔다. 카트에 이것저것 장을 보는데 직원이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와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아직은 채 익지 않은 레몬이었다. 이곳에선 수입농산물을 팔지 않기에 자세히 보니 제주산이라고 적혀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투명케이스에 담긴 레몬 세 개를 샀다. 초록과 연두색 사이를 오가는 레몬은 상큼한 분위기였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비타민씨 함량이 높아 요즘 인기라는 그린 레몬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걸 만났으니 케이크를 구울 이유가 생겼다.   

레몬케이크와 레몬 

레몬을 베이킹소다로 문질러서 씻고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촉촉한 물기를 닦아낸 다음 강판에 간 레몬 껍질에 설탕을 더해 레몬설탕을 만들었다. 살포시 살포시 향이 날아온다. 그동안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고소하거나 달콤함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보다는 새콤하면서도 생생한 냄새가 활력을 전한다.


미리 꺼내둔 말랑한 버터에 레몬설탕을 넣고 크림 상태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달걀 물을 천천히 부으며 잘 섞은 후에 마지막으로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를 채 쳐서 넣으면 반죽이 마무리된다. 파운드케이크 작은 틀에 담고는 170도 오븐에서 40여 분을 구웠다.     


오븐에  들어간 지 십여분이 지날 무렵부터 레몬 향이 난다. 채 익지 않았을 때는 희미한 그린색이 돌던 반죽이 익어갈수록 맑은 갈색이다. 껍질을 쓴 레몬을 반으로 잘라 즙을 내어 설탕을 더하고는 시럽을 만들었다. 구운 빵에 젓가락으로 곳곳에 구멍을 만들고 시럽을 부었다. 빵은 촉촉해지고 향은 더 짙어졌다.     


포장 상자 옆에 있는 농부 이름을 보며 레몬이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상상이 갔다. 귤과수원을 평생 일군 부모님을 봐 왔기에 우리 집으로 온 레몬 역시 어느 농부의 쉼 없는 발걸음이 모인 결과였다.      


케이크는 얼마 동안 만든 것 중에 제일 모양이 예쁘다. 한눈에 봐도 먹고 싶을 만큼이다. 그건 레몬에서 비롯되었다. 추운 날씨에 초록 과일은 그 자체로 새로운 감정이 샘솟도록 했다.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도 다른 때보다 즐거웠다. 


여기저기 제빵 도구들이 널려있는 작은 부엌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간 레몬 향은 긴장했던 몸을 절로 느슨하게 했다. 고향 땅에서 왔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주공항에 내렸을 때 다가오는 편안함과 비슷한 결이었다.      


레몬은 엄마가 보내준 게 아니어도 내 삶의 뿌리를 이룬 그곳,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더 애틋했다. 왕 달걀보다 조금 큰 레몬 하나가 내게 소리 없는 말을 건네는 듯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음식 맛은  내 손을 거치는 과정 이전에 재료가 지닌 본연의 것이 모든 것을 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레몬 케이크 역시 그와 비슷했다. 레몬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어느새 신맛이 내 몸에 밀착돼 있다. 그만큼 레몬은 강렬한 특징을 가졌다. 무엇을 하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잃지 않는다. 

   

레몬은 일상에 집중하려 하는 내 생활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케이크 속에 들어간 레몬의 톡 쏘는 향은 밀가루를 만나도 아련한 선명함으로 남아있다. 작은 조각을 맛봤을 뿐인데도 "여기 레몬 들어있네"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케이크를 만들며 자기다움을 이어가면서도 조화로운 레몬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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