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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06. 2023

부드러움 속 단단함, 뭇국

하루를 세워주는 음식  

먹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음식이 있다. 날이 추워지면 문득 찾는다. 아침에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어릴 땐 무가 물컹거리는 느낌이 싫어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부터는 사랑한다 말을 할 만큼 즐긴다.     


내 손으로 만들지만 이건 계절과 시간이 만들어 내는 기분이다. 냄비에 고기를 넣고 집간장으로 간이 배게 한 다음 무를 넣고 함께 익힌다. 고기의 핏기가 가실 무렵 다시마 조각을 담가뒀던 물을 냄비에 붓는다. 보글거리기 시작하면  거품은 맑은 맛을 위해 걷어내고, 중간불로 끓인다. 이때 어슷썰기 해둔 청양고추와 다진 마늘을 조금 넣어 담백함을 준다.  이제 20여분을 충분히 기다리면 국이 완성된다. 싱거우면 천일염을 더하면 마무리다. 

아침 식탁에는 소고기뭇국과 김치만을 올렸다. 다른 찬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 국을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는 부드러움 속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함이 있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무를 가득 담아서 무맛을 일부러 느끼려 한다.      


고기의 고소함과 담백함이 무 안으로 스며들어 따끈한 부드러움이 몸을 꽉 채운다. 기대보다는 불편함이 크게 다가오고, 얼마 없으면 집을 벗어나야 할 때라는 분명한 사실이 싫을 때 따뜻한 국물이 주는 넉넉함에 기대어 본다. 남편도 아이도 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다들 별말 없이 아침을 먹었다. 조용한 식탁은 어색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 땐 말을 하지 않고 식탁에 함께 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누구나 아무것도 꺼내놓고 싶지 않을 만큼 답답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아침을 열어준 소고기뭇국 한 그릇

시계를 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확인하면서 서둘러 밥을 먹는 일이 싫을 때는 “난 나중에 먹을게”라고 한마디를 던지고는 일을 한다. 늦잠 자는 막내가 식탁에 앉을 즈음 국을 데웠다. 아이는 언제나 건더기보다는 국물을 좋아한다. 밥이 줄어들수록 국물도 바닥을 드러낸다. “내가 만든 게 맞아?”라는 혼잣말을 하며 부지런히 먹었다.


요리의 즐거움과 행복이 다가오는 잠깐이다. 아침밥을 차려야 한다는 주부의 의무감과는 거리가 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이들까지 선한 기운을 주는 게  밥하고 먹는 일인 듯하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는 일을 누구를 위해서라는 식으로 정의할 때가 많았다.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틀린 해석이다. 이른 아침 무렵 자동으로 눈이 떠지고 부엌으로 향한다. 밥을 하면서 깨어난다. 별것 없다 여기다가도 무언가를 떠올려 만들어 낸다.


뭇국을 끓인 날도 그랬다. 흙 묻은 무를 씻고 둥글게 큰 덩어리로 썬다음, 껍질을 벗기고 도마에 올려놓는다. 자로 재지 않아도 눈짐작으로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사각 썰기 한다. 톡톡톡 리듬 맞춰 칼질소리가 얼마간 이어진다.  밤새 자고 있던 집안 구석구석을 깨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내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내 시간이다.      


그렇게 재료 준비를 하고 냄비에서 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나와 적당한 거리가 생긴다. 아무리 애써서 맛있게 만들려고 해도 별로 일 때도 있다. 때로는 그냥 되는대로 넣어도 어느 때보다 감탄하는 맛이 찾아온다.     

이때 조화와 자연스러움을 떠올린다. ‘될 만큼 된다’는 삶의 논리가 작동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마주해야 하는 일상과 달리 요리는 맛을 끌어올릴 수 있는 조미료가 있어서 다행이다.     


추운 날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지, 집을 나서는 것조차 망설여진다면 소고기뭇국을 추천하고 싶다. 적당히 달큼한 국물과 도톰한 소고기 몇 점을 먹으면 기운이 나는 것 같다. 비록 짧은 착각일지라도 기분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타인에게 기대했던 것을 나로 돌리는 일은 소고기뭇국을 끓이는 것과 비슷하다. 당연한 일, 아침에 일어나서 내 일을 하면서 새로운 날에 한발 가까이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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