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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08. 2023

타인의 호박죽

이런저런 인연이 요리에서 만나던 날

늙은 호박 하나가 김치냉장고 옆에 자리를 잡고 머문 지 두 달이 되어간다. 호박을 열어보기 전에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도 없다. 상하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찾아오면 마음만 급해지다 잊혔다. 자기 전에 내일 해야 할 일을 하나 정했다. 냉동실 청소였다. 이런 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천천히’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서둘러서는 괜스레 피로만 쌓이고 금세 하기 싫어진다. 노는 것처럼 차분히 하다 보니 30분이 지났을 무렵 정리되었다.  


그때 냉장고를 바라보며 정면에 있는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망설이다 호박을 정리할 겸 오랜만에 호박죽을 만들기로 했다. 늙은 호박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때가 있다. 넉넉한 외할머니 미소를 떠올릴 만큼 정이 가는 것일지라도 속을 보면 썩어있거나 벌레가 집을 짓고 있는 경우다. 

“집에 있는 호박 중 제일 예쁜 것만 가져왔는데, 속은 어떨지 모르겠어.”

어느 가을날에 호박을 주고 간 옆집 언니가 지나가듯 하던 말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신문지를 부엌 바닥에 깔고는 호박을 반으로 잘랐다. 아니나 다를까 벌레가 있다. 어느 한쪽 면은 썩어가는 중이었다. 속을 파내어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숟가락으로 대충 북북 긁어내었다.  그런 다음 칼로 문제가 된 부위를 도려내었다. 다행히 호박 속살은 주황과 황금빛 사이에서 맑게 빛났다.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저것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호박죽과 호박 그리고 찰떡

  

한참이나 집에 머물던 늙은 호박에는 내가 모르던 세계가 있었다. 눈으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고민이 쌓일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라는 물음을 던지면 돌아오는 건 “다른 이들도 다 비슷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호박은 힘든 시간을 단단히 버텨주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호박을 듬성듬성 크게 대충 썬다음 씻고는 푹 끓였다. 으스러질 만큼 다 익었을 때 블렌더로 갈았다. 냉동실에 있는 찰떡 3조각을 꺼내어 적당한 크기로 썰어 폴폴 끓고 있는 냄비 안으로 넣었다.  떡이 익어가면서 적당히 차지고 끈기가 생기더니 제법 익숙한 호박죽을 만들어 갔다. 간을 하지 않아도 떡이 달고 짠맛이 강하니 충분했다. 순식간에 호박죽이 완성되었다. 별생각이 없던 점심 메뉴는 호박죽이 되었다. 

   

패트스푸드같이 서둘러 끓여낸 죽이었는데 예상보다 괜찮다. 떡이 없었다면 찹쌀가루를 넣거나 쌀로 죽을 만들어야 했다.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방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친정어머니가 종종 남은 떡을 호박죽이나 팥죽 끓일 때 넣는다는 것.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바로 적용했다. 떡에 들어있던 검정콩, 강낭콩, 밤과 여러 가지 잡곡들이 죽 안에서 제 역할을 했다. 부드러운 호박만 있었다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죽이었다. 이들이 있어 죽에 생기가 돌면서 경쾌한 리듬감이 흘렀다.   

  

떡은 남편이 회사 동료가 경조사에 맘을 보태주어 고맙다는 인사로 돌린 것이었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주인 없는 떡이 덩그러니 남아있다며 챙겨 온다. 떡은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냉동실에 직행할 때가 많다. 죽을 만들면서 그 쓸모를 알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마음을 받게 되는 인연에 놀란다.     


어릴 적 아버진 틈만 나면 사람은 혼자는 못 산다며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있더라도 극단적으로 치닫기보다는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죽에 떡을 넣어도 괜찮다는 지혜를 알려준 이웃 어르신과 떡을 준 남편의 회사 동료까지 이들의 마음이 내게로 와닿았다. 얼굴을 맞대고 그들과 대화하진 않았지만 마치 좋은 관계를 맺은 것 같은 기분이다.      


호박죽은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곰하다. 죽을 뜰 때마다 드문드문 만나는 찰떡은 호박에 축여져 촉촉하다. 이웃 언니가 바닷가 마을 밭에서 키운 호박이 내게로 올 때부터 다른 이들과 연결되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매력적인 건 이런 새로운 경험이 가슴에 다가올 때다. 요리는 내가 모든 걸 알아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타인의 정성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호박죽을 만들며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절로 포근해지는 호박의 은은한 노란빛만큼이나 넉넉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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