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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12. 2023

생각, 고로케

끄물끄물한 날 요리

인상적인 장면은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직접 찾아가서 경험하거나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들게 하는 동기가 된다. 어제저녁도 그랬다.  <생활의 달인> TV프로그램에 38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본 고로케가 나왔다.  얼마나 특별하면 언제 올지 모를 만큼 막연한 미래를 기다릴 수 있을까?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맛을 떠올렸다. 

끄믈끄믈한 날 만든 감자고로케

스치듯 본 후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고로케를 오랜만에 만들어 볼까?’ 하는 의지가 고개를 들었다.  화면 속 장면처럼 상당한 내공을 가졌거나, 이야기가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순 없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을 끄집어내어 손을 조몰락거리는 것. 과거의 경험을 현재로 이끌어내는 게 전부였다.  


“엄마가 내일 고로케 간식으로 만들어 줄게.”

“진짜?”

“응 오후에 학교 다녀오면 먹을 수 있을 거야.”

아이는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이다.     


점심 모임을 다녀온 오후 3시 무렵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빵 형태로 만든 다음 튀겨내기에 반죽을 준비했다. 밀가루와 미지근한 물, 이스트와 설탕 소금, 식용유를 잘 섞은 다음 30분을 따뜻한 곳에 두었다. 다시 잘 발효된 반죽을 꺼내어 8개 둥근 빵을 만들고, 15분을 두었다가 소를 담았다. 


아침에 먹었던 포슬포슬한 감자 두 개를 쪄내고 양파와 당근, 햄은 채를 썰어 두었다. 소금을 조금 넣고 채소를 볶다가 햄을 더하고 마지막으로 다진 청양고추를 넣었다. 기름에 튀길 예정이기에 느끼한 맛을 잡아주기 위함이었다.      


부드러운 연한 노랑과 하양 빛을 내는 감자에 옥수수 통조림까지 더하니 제법 알록달록하다.  마지막으로 마요네즈를 넣고 버무렸다. 반죽에 소를 담을 때는 숟가락을 들어 가능한 한 많이 넣고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잘 여며주었다.      


뜨거운 기름에 들어가기 전 차가운 물에 빵을 담근 다음 빵가루를 묻혀내어 튀겼다. 먼저 하나를 넣었더니 기름이 물거품을 이루듯 퍼져나갔다. 쏴아 하는 기름 보글거리는 소리가 정겹다. 그렇게 고로케 8개를 만들었다.     


제법 크기가 있어서 큰 접시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밀가루를 만지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빵 만드는 일을 잠깐 쉬고 있던 터라 밀가루 반죽이 주는 부드러움이 신선했다. 번거로울 수 있는 이것을 하는 내가 무척이나 신기했다.     

고로케 여정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이득인 것도 별로 없다. 과정마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밀가루가 날리고 설거짓거리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시간의 순서대로 몸을 움직인다.     


이것을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한동안 잊고 있던 것을 만들어 알고 있지만 어렴풋한 음식의 느낌을 확인하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건 아마도 몰입이라는 것과 관련 있는 듯했다. 다른 고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를 하면 다시 해야 할 일이 따라온다. 감자를 깎으면 삶아야 하고, 다른 채소를 손질하는 일이 이어진다. 그전에 빵 반죽을 해서 부풀어 오르도록 충분히 기다리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고 엿볼 한가함이 없다.  

   

그저 앞에 있는 고로케를 완성하기 위해서 계단을 차례대로 오르듯 움직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끝이 보인다. 고로케가 기름에 잘 튀겨진 채로 내 앞에 놓여있다. 


고로케는 기름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를 알려주는 진한 갈색이다. 투박해 보이지만 빵 속에는 입안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머물러 있다. 요리하지 않은 이는 겉으로는 무엇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속이 빈 고로케를 상상하기 힘들다. 단순해 보이지만 요리사가 담고 싶은 것들이 빵 안에 숨어 있어 고로케라 불린다. 우리가 드러나지 않은 내부의 것이 더 집중할 때 단단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90분 정도를 들여 원하던 것을 완성했다. 요리는 일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결말을 맺을 수 있는 살아있는 공부다. 나만의 부엌에서 머릿속으로 그려 본 것을 만들며 나를 만난다.  이슬비가 종일 내리던 끄물끄물한 날은 고로케를 만들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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