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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13. 2023

기다려야 만나는 묵은지찜

깊은 맛에 반하다

김장을 하고 2주가 다 되어간다. 이때 귀한 게 묵은지다. 새롭게 김치를 담갔으니 마음은 부자지만 오래 묵혀둔 그것이 없다면 겨울 요리에 한계가 있다. 다행히 올해는 이것이 넉넉하다. 먹는 일에서도 새것과 오래된 것이 교차할 때면 기분이 묘하다. 한해살이에서 쉼 없이 냉장고 안팎을 오가는 김장에 정성을 들인다. 오래 두고 먹는다는 분명한 이유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 이런 마음으로 통을 차곡차곡 채웠던 김치는 김장 무렵에는 외면받는다. 새것을 들여야 하니 한정된 냉장고 공간이 비어있어야 반갑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빈자리를 찾아야 하기에 때로는 묵은지가 부담스럽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는 두 칸으로 나눠진 오래된 모델이다. 편리함을 위해  한편은 김치를 나머지 한쪽은 채소와 과일을 두고 먹는 까닭에 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묵은지 한통이 원래 머물던 곳에서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온도는 조금 높고 이런저런 것들이 모여있어 복잡한 그곳에 두는 순간 관심에서 멀어진다. 

겨울 맛 묵은지찜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니 꺼내어 먹는 일도 번거롭다. 김치통은 아래에 있고 위에 과일과 여러 가지가 놓여있다. 그래서 한 번에 넉넉한 양의 김치를 꺼내 둔다. 싸늘한 날씨에는 김치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많다. 불현듯 내가 사랑하는 그것이 생각났다. 묵은지 찜을 만들고 싶었다. 다른 식구들은 그리 찾지 않는 나를 위한 음식이다.     


김치를 깨끗이 씻어내고 포기째로 냄비에 넣었다. 잠길 만큼 물을 붓고는 강한 불에서 끓이다 중 약불로 줄였다. 국물멸치나 디포리로 육수를 내지만 편하게 만들기로 마음먹고는 참치 액젓 한 숟가락을 넣고 냄비뚜껑을 닫았다.  어느새 콤콤한 냄새가 난다. 김치가 익어간다는 증거다. 다른 음식에 비해 조리 과정에서 별로 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맛은 일품이다. 


묵은지 맛을 따라가다 보면 소박한 시골 풍경이 떠오른다. 이 담박한 분위기가 전해지는 음식을 좋아하게 된 건 나이 듦과 함께다.  빨강 초록, 노랑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요리보다도 색을 잊어버린 듯한 오래된 것에 끌릴 때가 있었다. 어느 시골 밥집에서 먹었던 것을 한 두 번 만들며 이제는 꽤 친해졌다.  

 

이 요리는 내가 첨가해야 하는 게 별로 없으니 잘하고 못함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 있을까 싶지만, 사실과 다르다.  잘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로 분명히 구분될 정도다. 충분히 맛 든 것을 즐기고 싶다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래야 깊은 매력을 만날 수 있다. 중간 단계에서 다진 마늘 조금, 다 되어갈 때 들기름 혹은 식용유를 더하면 이것만의 풍미가 살아난다.  

    

빨리 먹고 싶다고 급한 마음이 들어서는 날은 시작하지 말아야 할 요리가 묵은지찜이다. 저녁에 해 두고 다음 날 아침에 먹어야겠다는 계획이 서는 날 만드는 게 알맞다. 늦은 오후 무렵에 만들었다. 다른 이가 기다리지 않으니 가족이 먹을 저녁 찬을 만들며 가스레인지 위에 그대로 두었다.  

   

저녁준비가 다 되어갈 무렵 젓가락을 들어 김치를 콕 눌러보니 절로 쏙 들어간다. 김치가 다 익었다. 색깔은 늦가을 낙엽 같다. 한동안 이것만 있으면 다른 찬을 찾지 않아도 식탁에 앉을 때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을 만들 때마다 다가오는 것들이 늘어난다. 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더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 맛을 보고  쓰다는 기분에 단맛을 주는 무엇을 넣고 싶어 진다. 매실청이나 설탕이 들어가면 괜찮을 수도 있지만, 적정선을 지키기가 어렵다. 잠깐의 손 흔들림으로 왕창 쏟아부을 수도 있으니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망설여진다면 그냥 그대로의 맛을 즐기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김치찜은 다른 어떤 요리보다 간단한 듯하지만 어렵다. 그저 바라보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잠시 딴 곳을 기웃거리며, 무심히 두는 일이 오히려 잘 된 음식을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득 사람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오래도록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점심에 잡곡밥과 김치찜 몇 조각이 전부인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씁쓸하면서도 적당한 짠맛이 다가오는가 하고 알아차리면 어느새 사라지는 묵은지의 부드러움이 마음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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