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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15. 2023

군고구마에 버터가 스며들 때

친구 생각

날씨는 잔뜩 흐렸다. 햇빛을 보기 어려우니 작은 우울이 오래 머물러 뭔가를 열심히 할 마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찾아오는 건 달콤한 것에 대한 끌림이다. 맛난 걸 먹고 싶다. 이럴 때 과자를 먹으면 금세 질리고 후회한다. 

    

자연에서 온 것은 이럴 일이 별로 없다. 먹어도 몸에 부담을 주는 일이 적어서다. 군고구마가 제격이다. 고구마가 구워지면서 나는 고소한 냄새는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 틈이 없이 잠시 동안 기분 좋아진다. 고구마 6개를 씻었다. 엄마가 농사지은 고구마는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수분함량이 높다. 꽤 큰 것도 빨리 구워지고 속도 촉촉하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군고구마를 만들 수 있는 건 에어프라이어 덕분이다. 오븐에서도 가능하지만 느낌상으론 에어프라이어의 순간 온도가 더 높아 제격이다. 190도로 50분을 구웠다.  평소 같으면 호호 불면서 껍질을 벗기고 먹을 테지만 하나를 떠올렸다.     

버터와 군고구마

냉장고서 버터를 꺼내 적당한 크기로 사각 썰기하고 반을 가른 고구마 위에 올렸다. 따끈한 고구마는 서서히 버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접시에 고구마를 올리고 티스푼으로 떠먹었다. 고구마를 손에 들고 먹으려고 하면 버터의 지방이 손에 잔뜩 묻을 뿐만 아니라 뜨거워서 먹기가 힘들다. 여유 있게 버터품은 고구마를 음미하려면 작은 스푼을 들어 한겨울 아이스크림을 떠먹듯 먹어야 제 맛을 알게 된다. 이때 찾아오는 잔잔한 여유는 겨울날에야 느끼는 진한 행복감이다.  


고소한 끝 맛에 기분이 상승곡선을 탄다. 평소 먹던 군고구마보다는 고급스럽다. 작은 버터 두 조각이 고구마 속살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버터를 만나 더 촉촉해지고 풍미 가득한 고구마를 보면서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 삶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들어 주는 친구다. 남편 직장을 따라 낯선 곳에서 살게 되면서 알게 된 이다. 그는 타인에게 은은한 따스함을 소리 없이 전한다.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잘 살고 있어요? 별일 없죠.”

몇 마디에 가슴이 찡하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던지는 짧지만 마음 가득한 질문이었다.

그냥 그냥 지나던 일상에 문득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물어 온다. 힘든 일이 생기면 다 잘 지날 거라고,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나 얘기하라며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어느 날은 서울에 일이 있어 아침부터 집을 비웠다. 오후에 큰아이의 전화다.

“엄마, 문 앞에 종이가방에 뭐가 있어?”

아이는 낯선 물건이 꽤나 신경이 쓰였는지 연락을 했다. 도통 누가 놓고 갔는지 짐작 가는 이가 없다. 저녁 9시가 다되어갈 무렵 집으로 돌아와 보니 투명 봉지 두 개에 맵쌀과 찹쌀이 한 봉지씩 들어 있었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샘, 이제야 봤어요. 쌀 두고 갔어요?”

“네, 햅쌀이에요. 밥 한번 해 먹으라고요.”

울컥했다. 채소 같은 건 종종 받아보지만 쌀은 흔한 일이 아니다. 몇 년째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내게 건넸다. 시골에서 오빠가 농사지은 걸 전한다. 매일 밥 먹는 일을 중요시하게 여겨서 그런지 특별한 선물이다. 마치 밥 든든하게 먹고 기운 내서 살아가라는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잠시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진정성을 논하는 일이 어색한 세상에서 진심이 그대로 가슴에 와 안긴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아주 조금씩 세상에 대한 시선이 변해감을 느낀다.  가능한 한 타인에 대해서는 배려하는 눈길로, 정성으로 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담담히 맞이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헤쳐나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열심히 움직인다. 운동하고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버터를 더한 군고구마를 먹다 전과 다른 맛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던 중 그가 떠올랐다. 흐린 날 군고구마는 버터를 만나 이전과 구분되었다. 삶에도 이런 존재가 필요하다. 그로부터 다시 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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