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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04. 2023

겨울엔 팥죽

추운 날 따뜻했던 부엌 이야기

며칠 전 함박눈이 내렸다. 내리는 즉시 다 녹아버렸지만 겨울이 내 곁에 왔다.  당연하지만 여전히 낯설다 여기면서도 이 계절을 받아들인다. 가장 먼저인 게 먹는 일이다. 동네 친구는 김장을 엊그제 마쳤다.  

   

내게도 김장 숙제가 찾아왔다. 그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팥죽 끓이기다. 붉은팥을 알알이 살피며 쭉정이를 꺼내고 물에 불린 다음 삶는다. 흰 죽을 끓이다 팥물을 부어 보글보글 끓여내는 과정이 그리웠다. 

     

추운 날이 오면 음식을 조리하는 일도 다른 때보다 시간이 걸린다. 겨울 음식은 푹 끓여야 제맛이다. 하얀 눈을 아름답다 하면서도 때로는 한기가 싫어서 봄을 기다린다. 그동안 부지런히 따뜻한 요리를 해서 마음을 채운다.

      

팥죽은 그런 계절과 하나 되는 가운데 있다. 가을에 거둬들인 팥을 잘 말려서 보관해 두었다가 먹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 요리한다.  엄마가 농사지은 보물이다.     


마음이 급하다고 빨리할 수 없는 게 팥을 이용한 음식이다. 단단한 잡곡은 물을 만나 충분히 불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일을 하면서라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억지로 빨리하려다가는 망치기 마련이다. 책도 읽고 청소도 하면서 팥이 조금 부드러워지도록 한다. 오래전 들었던 엄마의 말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본다. 


팥죽을 두세 번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들이 더해진다.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다. 부엌에선 이런 경험이 나만의 음식을 완성해 가는 밑거름이다.    


어릴 적 팥죽 쑤던 날로 들어가 보았다. 11월 중순 무렵이면 다른 마을에 사는 할머니 두세 분이 우리 집에서 지냈다. 귤 수확이 한창이었기에 동네서 일손을 빌리기는 하늘에 별 따기여서 이분들이 우리 일을 도와주었다. 

    

부모님은 여름부터 낯선 동네에 가서 가을에 일할 이들을 수소문해서 약속을 잡는다. 주위 밭들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계절이 오면 우리 집 방 하나는 할머니들의 숙소가 되었다. 순간에 가족이 두세 명 늘어나니 정신이 없다.     

겨울날 팥죽

매일 일찍 일어나 아침을 함께 먹고 과수원에 간다. 어스름이 지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 밥상에서도 얼굴을 마주한다. 한 달 정도 꾸려지는 겨울 대가족이다. 


겨울날 섬 날씨는 워낙 변덕이 심해서  눈이 날리는 날이 많다. 어느 날은 오전에 일하는데 눈 오고 바람 부는 궂은 날씨 때문에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놀이 삼아 팥죽을 해 먹기로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살던 시절이었다. 눅눅해진 장작은 부엌 가득 연기를 내뿜었다.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 어르신들은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이 피었다.     


학교 갔다 온 나는 옆에 앉아 귀를 활짝 열어 두었다. 알 듯 모를 듯하지만 재미있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혹은 시집와서 겪었던 일들을 쉼 없이 이어진다. 그땐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랬었지" 하고 추억하는 이야기들은 어떤 그림책보다도 빨려 들게 했다.     


할머니들은 한 손으로는 불이 잘 붙도록 아궁이를 살피면서 다른 손으로는 매운 연기기운에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저게 무슨 말이지 싶을 만큼 그들의 언어가 넘쳐난다.   

  

엄마는 창고에서 귤을 손보기로 하고, 부엌을 할머니들에게 잠시 맡겼다. 할머니들이 주인이 되어 팥을 끓이고 쌀을 부어 죽을 만들었다. 할머니들은 둥근 밥상을 부엌 가운데 펴놓고 시큼해진 김치를 손에 들어 찢으면서 팥죽을 행복하게 먹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뜨거운 죽을 호호 불었다.  

  

부엌으로 해가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어린아이 장난치듯 한다. 여기에 삼나무가 꼭 부러질 것 같은 거센 바람결도 심상치 않다. 김이 모락모락 퍼져나가는 죽 한 그릇은 바깥과는 정반대의 세상을 열어주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른들이 있어서 안전한다는 포근함과 편안함도 덤으로 전했다.


팥죽을 끓인 건 초등생이던 시절 이런 기억이 한몫했다. 지금은 어디서도 찾기 힘든 그때의 정서가 그립다. 타인과도 그때처럼 빨리 편해지기 어렵다. 


새알심 대신 냉동실에 있는 오랜 팥 찰떡 두 조각을 가위로 잘라 넣었다. 따뜻한 팥물에 절로 모습은 사라졌지만, 살짝 단맛이 찾아온다. 팥죽에는 내가 간직한 따뜻한 겨울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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