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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25. 2023

맘대로 밤

밤잼 만들던 날 마음 날씨

냉장고에 있는 밤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지난 저녁에 함박눈이 날리더니 아침은 올해 들어 가장 쌀쌀하다. 몸 상태가 별로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따른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나 보다. 평소에 하던 일도 이때만큼은 그만두어야 할 때다. 그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었다. 한 시간 반을 담가 뒀던 밤 껍데기를 벗겨내었다.  40분 정도를 하니 껍질이 수북이 쌓였다. 고운 밤색을 위해 팔팔 끓는 물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고 40여 분을 삶았다. 다 삶아진 밤에 흑설탕과 물을 조금 넣고 졸이면서 잼을 만들었다.     


삶은 고구마 같은 부드러움을 기대했는데 알이 컸던 밤은 여전히 단단하다. 블렌드로 갈아야 하는데 이날 따라 손에 힘을 주고 누르는 작업을 고집했다. 차분하게 바라볼 틈이 없으면 정반대의 것을 밀고 나가게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확고할수록 무리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설탕을 만난 밤은 시골 비포장도로를 연상시킬 만큼 거칠었다. 


달콤한 밤맛이었지만 예쁘지 않으니 그리 마음이 가지 않았다. 내가 했으면서도 못마땅하다.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리는 마음이 절반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편도가 부었다. 코도 덩달아서 한쪽이 막히면서 답답했고, 두통까지 일어났다. 감기가 찾아오는 모양이다. 좋은 기운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니 과정마다 대충 할 수밖에 없다.      

밤잼을 품은 모닝빵

이럴 때는 평소 대강대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조금 편해지고 싶어서 가볍게 빨리 끝내는 것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건 천지차이다. 밤 잼은 사각 유리통에 담겼다. 열심히 손에 힘을 주고 손질해 낸 과정에 비해 결과물은 소박했다. 흑설탕을 넣어서인지 밤 색깔은 갈색과 회색사이에 머물러 있다. 흐리고 찬 바람이 부는 날 풍경이 그릇 안에 담겼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잘 만들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 무엇을 꺼낼 때마다 밤이 보였다. 오동통한 갈색을 띤 밤들이 자기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얘기하는 듯했다.  움직여서 무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이런 감정이 오래 머물렀는지 그 많은 평일을 뒤로하고 복잡한 휴일에 밤을 꺼냈다.   

  

밤을 손질하면서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많이 와 버렸다. 얼마는 삶아서 남편에게 건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밤을 만진  손끝이 아려온다.  처음에는 고운 크림으로 만들어 빵에 발라먹고 싶었다. 밤우유도 만들고, 밤빵에도 도전해 봐야겠다고 계획했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던 밤이었다.     


계획했던 일들이 미완성으로 흘렀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편안하지 않으니 딱 그만큼의 결과물이다. 안 해본 것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다독이며 스스로 불편해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보통의 기분으로 음식을 만들었던 수많은 날들에 감사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잼 만들기에 나섰던 것 역시 마음 둘 곳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애써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 이르면 그때 쉬고 있는지 모른다. 이날처럼 엉망이라는 나름의 평가가 따라오면 정말 힘든 날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을 다시 바라보게 될 때 그동안 몰랐던 삶의 패턴을 마주한다.     


며칠 지난 잼은 여전히 달달하다. 별로라고 여겼던 그때가 흘러가니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냉장고에 묵혀두기보다 그날 잘했다는 것. 그런 날도 이런 날도 모두가 내 생활이었다. 좋은 것만을 바라는 고정된 상태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여유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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