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먹기
당근과 호박을 썰었다. 양배추와 버섯도 함께다. 아침과 저녁밥을 준비할 때면 어느 때보다 손이 바쁘다. 예전에는 안 하던 일이 하나 늘었다. 별건 아닌데 꼭 챙겨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지 2주 정도 접어든다.
밥을 먹는 일에서 항상 뭔가 다른 것을 차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반찬 고민이 습관처럼 따라다닌다. 어제와 다른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바람도 여기에 더해지니 가끔 난감할 정도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상을 차린다. 익숙한 음식에서 그동안 별로 올리지 않았던 걸 더한다. 고기 요리가 주가 될 때가 많다. 달거나 짭조름한 자극적인 양념이 들어가서 한입 먹으면 “그래 이 맛이야”하는 말이 자연스러울 만큼이다.
내 몸을 생각하는 음식을 고려한 적이 별로 없다. 혼자 점심때 먹고 싶은 걸 요리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그리 챙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를 위한 음식을 생각했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하게 먹을 수 있는 것.
어느덧 노안이 찾아오는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당근을 하루 한 끼는 꼭 챙겨 먹고 있다. 그러다 여기에 호박과 버섯, 양배추 등 익숙한 채소들을 함께 먹는 한 그릇을 생각했다. 유튜브를 통해서도 본 적이 있지만 간단했다.
채소를 썰고 4~5분 정도 찐 다음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등으로 버무려서 먹기다. 가끔은 소스를 따로 만들기도 하지만 채소에 무엇을 넣는 걸 최소화하기로 했다. 재료만 준비했다가 식사시간 전에 썰고 쪄내면 끝이다.
다른 식구들의 찬을 준비하면서 해도 무리가 없다. 그렇게 먹다 보니 각각의 맛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당근 특유의 향에만 집중하다가 아삭한 맛과 더불어 개성 있는 달콤함, 언제나 진한 주황색을 잃어버리지 않는 고집까지 새롭게 다가온다.
그동안 애호박은 된장찌개나 전, 볶음 요리에 주로 사용했다. 살짝 진 애호박은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히 달아서 먹기에 좋다. 아삭한 양배추에 이것을 넣고 쌈장을 아주 조금 넣거나 그대로 쌈을 싸 먹어도 별미다. 제철인 두릅도 며칠 동안 맛봤다. 쌉쌀하면서도 거친듯한 부드러움에 숲향 같은 자연의 맛에 놀라는 중이다.
채소를 충분히 먹으니 식사시간이 길어진다. 밥에 여러 반찬으로 향하던 내 젓가락은 앞에 있는 채소 접시에 머물 때가 많다. 그래도 지겹지 않으니 오히려 이것이 낯설다. 어느 날은 올리브유의 향이 강하게 다가왔다. 불편한 게 아니라 묘한 설렘이었다. 식탁 위에 음식은 익숙한 것인데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먹다 보니 몸이 훨씬 가볍다. 속이 답답한 느낌이 없으니 움직이는 동안 가뿐하게 일을 처리하게 된다. 아이가 말을 해도 심각하게 반응하기보다 “그랬어”라고 단순히 답하는 횟수도 늘었다. 내가 이러니 아이 역시 다른 때 같으면 장황하게 설명할 것도 쓱 지난다. 매일 부딪히는 일에서 복잡해지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기분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채소들을 가까이하면서 나 역시 미세한 변화를 의식하는 중이다. 나를 위한 밥상은 결국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기도 했다.
마음은 워낙 변화무쌍해서 그것을 잘 바라보고 따라가기도 힘든 데 반해 몸은 정말 솔직하다. 난 워낙 예민해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되면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이렇게 신체화로 나타나는 것은 많이 힘들다는 것인데 그동안 지나쳐 버릴 때가 많았다.
당근과 호박을 먹고 양배추를 가까이하는 건 이런 나를 이제는 좀 덜 아프게 하고 싶어서다. 약보다는 생활 속에서 다스리는 게 오랫동안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 같다. 아침에 데친 토마토를 갈고 올리브유와 함께 먹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아침과 저녁이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간다. 한번 해보니 맛이 괜찮고 기분도 좋다. 종종 채소를 써는 순간에는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혼자만의 고요를 느낀다. 아마 그때 건강하게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무의식적으로 담고 있는 건 아닐는지. 있는 그대로 채소 몇 가지가 내 일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경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