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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y 17. 2024

이제야 알 것 같은 소울푸드

자리물회

사람들이 소울푸드라 말할 때 그것이 뭔지 몰랐다.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단어의 의미만으론 부족했다. 더구나 내게는 그런 음식이 아직이다. 그러다 그것이 무엇인지 문득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오빠네 집에 다녀왔다. 엄마는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먹거리를 보내왔다.     


그중에서 제일 관심을 끈 건 자리돔이었다. 고향에선 늦봄부터 여름까지 자리를 즐겨 먹는다. 비늘을 벗기고 손질한 다음 초장에 찍어 먹거나, 물회로 즐기고, 때로는 구워 먹었다. 자리는 비릿하지 않으면서도 고소한 담백함이 일품이다. 군더더기 없는 묘한 단맛까지 더해지니 먹을수록 정이 가는 생선이다. 


오빠는 물회로 먹었으면 했다. 엄마도 이런 오빠 마음을 알았는지 택배 상자에 말끔해 손질된 냉동된 자리와 물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제피(초피나무 잎)까지 보냈다. 제피는 향이 강해서 평소에는 쉽게 먹기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름 한 철에는 썩 괜찮은 요리재료다. 엄마는 주로 자리물회나 초장을 만들 때, 장아찌로 활용했다. 톡 쏘는 듯한 향이 오래 머물러 자칫 부담일 수 있는 날 생선요리에 유익하게 쓰인다. 


집 뒤에  우영이라 불리는 작은 밭 동백나무 옆에는 제피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이웃과 경계를 이루는 담벼락보다 한 뼘 정도 큰 나무는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오랜만에 제피와 마주하니 고향 집에 간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자리물회를 만들었다. 어릴 적 어깨너머로 엄마가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그걸 하나씩 기억해 냈다. 우선 손질한 자리돔을 가늘게 썬다. 그리고 큰 양푼에 마늘과 여러 가지를 넣어 양념된 된장과 식초, 부추, 풋고추, 오이, 깻잎에 양파까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채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버무렸다. 여기에 물을 붓고는 참기름과 깨를 넣고 그릇에 담았다.     

제주 바다

물회에서 퍼지는 제피향이 오래 머물렀다. 일반 식초로는 맛을 내기가 어려워 빙초산도 샀다. 엄마는 빙초산을 마지막으로 넣으며 항상 독한 것이라고 이걸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한 숟가락 가득 넣어 국물에 넣으니 엄마의 물회와 비슷하다.


어릴 때 먹었던 톡 쏘면서 달큼하고, 시원하면서도 묘한 물회맛이었다. 이 음식을 먹었던 한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다 그렇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해야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부모님은 물론 우리까지 같은 마음으로 지냈다.     


물회는 아버지의 시간과 함께다. 여름이면 아버진 새벽부터 일어나 점심 무렵까지 일하고 돌아와서는 점심상을 받아 들었다. 

“시원하다.”

아버진 물회가 밥상에 오른 날이면 국물을 짧게 들이켜고는 이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여름날 자리물회와 아버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땐 정말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아버지에게 자리물회 한 그릇은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위로였던 것 같다. 그때는 자리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저렴했다. 어렴풋이 오백 원 천 원어치도 아저씨가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물회를 먹고 한숨 쉬고 나면 불타는 듯한 태양의 기세가 숙어질 즈음 다시 과수원으로 나갈 힘을 얻었다. 


내게 자리물회는 그리 편한 음식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선이 입안에서 씹히는 맛이 낯설었고, 딱딱한 가시가 느껴질 때는 넘기는 일도 불편했다. 여름에 집에 갈 때마다 엄마가 물회를 먹겠느냐고 물었지만 괜찮다 했다.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먹을 게 많아서 이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날 오빠는 내가 만든 물회를 정말 반겼다. 그동안 종종 생각났는데 먹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고 했다. 오빠와 동생과 나는 물회를 먹으며 까마득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오빠는 여름에 집에 갈 때마다 이것을 먹고 싶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서 못 먹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했다. 이날을 통해 나 역시 물회맛을 알아가는 듯하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트럭을 몰고 동네를 다니는 자리장수들이 많았다. 이제는 박물관에 들어갈 듯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익숙한 것들과 거리가 생기는 게 세월의 무게인가 싶다. 최근에는 이상기후와 해양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인해 자리 역시 어획량이 감소하고 있다. 이날 밥상에 오른 자리 역시 언니가 궂은날 어렵사리 자리가 잘 난다는 포구에 가서 사 온 귀한 것이었다.   

   

이 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던, 둥근 밥상에 앉아서 물회맛에 감탄하던 아버지와 이별한 지도 십 년이 지났다. 물회를 먹으면 가슴 깊은 어딘가에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찾아왔다. 혼자 내색하지 않고 아버지를 그려보았다.


“야 이게 소울푸드다.”

오빠 한마디에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알 것 같다. 오빠가 다 꺼내놓지 못한 삶의 어려움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더 갈 수 없는 편안했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것인지도.  나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시원한 마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던 여름날을 다녀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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