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Jun 17. 2024

수박이 사라진 날

풍요와 결핍 사이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 3학년 정도였다. 언니 방구석에 있던 냉장고에는 얼마 남지 않은 수박이 있었다. 학교 갔다 오면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따라 학교 수업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학교와 집은 담을 넘으면 일 이분 안에 도착하고, 걸어서 가면 5분 이내에 이를 정도로 가깝다. 얼마나 빨리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여름방학 전이었다. 가방을 긴 나무 마룻바닥에 대충 던져놓고 냉장고로 달려갔다.     

 

수박이 없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것만을 바라고 지낸 하루였는데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누가 먹었냐고 묻고 싶은데 집에는 그럴 사람이 없다.     


화가 났지만 진정시키고 저녁을 기다렸다. 오후를 보내고 있으니 부모님이 어둑해질 즈음에 집으로 왔다.

“엄마 수박 누가 먹었어?”

“점심 먹으러 왔다가 덥고 해서 얼마 남지 않은 거라 아빠랑 먹었지.”

말문이 막혔다.

“엄마 그거 내가 먹으려고 했던 거란 말이야.”

소리를 빽 질렀다. 엄마는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다.

     

여름이면 수박을 간절히 먹고 싶었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 더운 여름 붉은 한 조각을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어느 날 남겨진 조각 수박은 먹는 걸 좋아하는 내게 학교에서의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작은 힘이었다. 지금처럼 수박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어서 어쩌다 마주한 행운이 날아가 버린 날이었다.     


어른이 되어도 여름에는 수박만 한 게 없다. 적당한 크기로 그릇에 잘라 두면 먹고 싶을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접시에 덜어서 먹는다. 수박 먹는 일이 그리 어렵지도, 기다려야 하는 일도 아니다. 


수박을 어제도 오늘도 몇 조각 먹었다. 차가우면서도 물컹한 그것이 입안에서 전해오는 느낌은 여름날 불편함을 잊게 한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수박이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다고 할 만큼 수박은 곧 여름이다.   

  

수박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이 계절이면 안녕달의 <수박수영장> 이 생각난다. 수박이 무더운 날 수영장으로 변하고 어른과 아이들이 그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내용이 따뜻한 그림 안에 담겼다.    

 

책 속 수박 안에는 위험이 될만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수박 속살이 반길 뿐이다. 아무 걱정 없이 그곳에서 지내다 보면 여름이 간다. 추운 계절을 보내야 다시 수박수영장이 열린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그 공간은 우리가 바라는 여름의 순간이 아닐까?   

  

수박을 매주 한 통씩 사는 것 같다. 매일 30도를 웃도는 날씨 때문인지 온 가족이 이것만을 찾는다. 옛날에는 수박 맛이 어떤지 몰라 사기 전에 수박 어느 한 편을 삼각형으로 잘라내어 잘 익었는지 확인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당도 측정기를 통해서 미리 선별하는지 발갛게 잘 익었고, 가끔은 너무 익어서 신선함이 떨어진 게 문제일 정도다.     


쉽게 수박을 먹을 수 있어서, 수박을 못 먹어서 감정이 복받치던 그때가 더 생생하다. '인상'은 풍족함보다는 결핍에서 만들어진다. 드문드문 만나야 달리 보이는 법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대부분이 일상에서 숨 쉰다. 그래서 먹거리든 물건이든 그것에 마음을 두고 관찰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인색해지는 듯하다.     


가끔 오래전 이야기가 떠오를 때면 그때의 감정이 살아나 가슴이 콩닥거린다.  매일 모자람 없는 걸 바라지만 실상 에너지는 부족함에서 더 강하게 분출하는 듯하다. 이번 여름은 수박 동산을 얼마나 쌓아야 보낼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