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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08. 2024

있는 그대로 여름 부엌

마음에 들어온 상추, 오이, 고추 

여름 반찬은 간단한 게 좋다. 더운 날씨에 이리저리 손이 많이 가면 여름과 의도하지 않게 씨름해야 한다. 부엌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온 생활이지만 이제야 이 계절에 무엇을 먹여야 할지 어렴풋한 그림을 그린다.


이건 매일 혹은 하루 걸러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어디서나 만나기 쉬운 채소다. 여름 뜨거운 볕을 거부하고 싶지만, 어찌 보면 이것들은 태양이 주는 선물이다. 어쩌다 쏟아지는 소나기도 이들의 성장에 한몫한다.     


요즘 같은 장마철은 채소 농사에는 위기지만 이것 또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 한 해를 보내는 중에 있는 일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농부의 신경이 곤두서고 몸이 곱절은 힘들겠다고 어림 짐작할 뿐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맛을 찾아가는 세밀함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특히 이 계절은 나름의 전략을 짜지 않으면 먹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채소를 활용하면 이런 일을 줄일 수 있다.


치과를 다녀오다 동네 로컬푸드 매장에서 상추와 오이고추 한 봉지를 샀다. 몇 년 전부터 상추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젠 집에 있어야 한다고 여길 만큼이다. 상추의 무게는 가볍지만  쓰임새는 절대 그렇지 않다. 상추 한 장에 밥을 올리고 쌈장을 더하면 입안 가득 행복감이 밀려온다.    

손이 안 간다고 하면서 몇 가지 양념을 더해야 하는 게 찬을 준비하는 보통의 일이다. 그러나 상추만은 오롯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리 쌈장을 만들어 놓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하지만 이 또한 시선을 살짝 돌리면 간편한 방법이 있다. 다양하게 나오는 시판 제품을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오이고추는 말 그대로 오이 같은 맛이다. 처음에는 고추가 너무 크고 아삭하지만 밍밍함에 별로였는데 자꾸 먹다 보니 이것 또한 매력이다. 맵지 않으니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단단해서 적당한 크기로 썬다음 양념장에 버무려 냉장고에 두면 며칠 동안은 물러지는 일이 없다.     


오이고추 무침에는 주로 집에 있는 쌈장을 활용한다. 특별한 마음을 먹고 다르게 시도하지 않을 요량이면 충분하다. 이 두 가지 채소에 평소보다 조금 싱겁게 만든 여름 김치만 있으면 다른 게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기는 아니지만 그런 기분을 내고 싶다면 견과류를 넣은 멸치볶음 정도가 있으면 훌륭하다.  참치통조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기름기를 짜내고 포슬 한 참치살만 올려놓고 상추에 쌈 싸 먹으면 금상첨화다.  

   

오이도 여름과 친구다. 채칼로 얇게 썬 오이를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면포나 손으로 꼭 짠다. 여기에 들깨를 넣고 잘 버무리면 오이들깨나물이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몇 번을 먹다 보니 재료의 두께가 맛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은 오이를 어슷하거나 반달 모양, 적당히 긴 세로 모양으로 썰었다. 내가 직접 써니 당연히 두께의 차이가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도구를 이용해 아주 얇고 일정하게 하니 편안하게 먹는 바탕이 되었다. 고소한 들깨가 풋풋하면서도 독특한 오이 향을 날려 버리고 나면, 오독오독 씹히는 쫄깃함이 찾아온다.   


초록의 채소를 매일 식탁에 올리면 밥 먹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유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단지 손이 천천히 움직이는 건 분명하다. 상추쌈을 예로 들면 상추 위에 밥과 쌈장 혹은 다른 찬들을 올리니 그 과정에서 무엇을 더할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새롭게 생겨난다. 그것만으로도 별생각 없이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때와는 달라 보인다.

 

고추나 오이를 먹을 때도 오히려 다른 것을 먹을 때보다 꼭꼭 씹는 기분이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아도 식탁에 접시가 여러 개 놓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날 것 그대로의 채소이지만 여름이 사각식탁에 살아 있다.    

오이고추무침과 오이들깨나물

오이고추와 상추가 각각 천 원씩, 이천 원으로 저녁 찬거리가 대충 준비되었다.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고 특별히 이것으로 색다른 요리법을 활용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있는 그대로 먹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며, 시작이고 끝이다.     


여름에 별로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름을 기꺼이 살피는 중이었다. 더불어 장점까지 살며시 알게 되었다. 주말에 사 온 호박잎이 그랬다. 내 얼굴 전부를 덮을 것 같은 큰 잎을 쪄서 쌈을 싸 먹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은 종일 이어졌던 습한 날씨와 온 식구가 함께 머무는 일요일의 피로를 날려 주었다.    

  

음식을 준비할 때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태도가 줄곧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식탁이 꾸려진다. 초록이 눈을 즐겁게 한다. 무더운 날 대표적 채소인 상추만 해도 아침에 따도 다음날이면 새로운 싹이 돋아나 자란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채소들은 가벼운 주머니 사정도 헤아려 준다. 이 계절에 내 마음에 들어온 다른 초록들이 없을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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