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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11. 2024

단호박 생활

여름 맛 

여름은 단호박의 계절이다. 수박에 집중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호박이 나온다. 동네 로컬푸드에선 단호박 혹은 밤호박이라는 이름으로 가격표가 붙어있다. 그만큼 달콤한 밤 맛이 난다는 의미일 거다. 주말 할인을 한다 해서 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한 상자를 샀다.      


호박 10개가 생겼다. 그동안은 필요할 때마다 한두 개 마련했는데 집에 여러 개가 둥글둥글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이것으로 무얼 해야 할까? 고민 아닌 고민이 늘었다. 우선 단호박을 찌기로 했다     


호박을 깨끗이 씻은 후 반으로 자른 다음 안에 있는 씨를 파내었다. 한 손에 들어서 먹기 좋은 크기의 조각으로 잘랐다. 김이 오른 찜통에 쪄서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밤호박을 먹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한 조각을 먹고 두 개째로 접어드니 제법 속이 든든하다. 익숙해질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호박향이 올라왔다. 달콤하지만 묘하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망설일 무렵부터 목에서 뻑뻑함이 느껴진다. 이래서 밤호박이구나 생각했다. 


단호박의 색은 매번 볼 때마다 놀랍다. 겉면부터 늙은 호박과는 확연히 다르다.  속 살은 비슷하지만 그것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분된다. 좀 더 연하고 부드러운 건 주황색의 늙은 호박이다.  단호박은 그 색에 빨려 들어갈 정도다. 어릴 적 먹던 호박은 물컹함에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크기도 작고 귀여운 이건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꽉 찼다.     

호박빵

답답함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은 물을 한 모금 먹어서라도 다시 호박으로 손이 향하도록 한다. 이것만 먹어도 좋지만 다른 것에도 잘 어울린다. 샐러드나 스푸 때로는 음료로 마셔도 훌륭하다.


흰 밀가루에 단호박을 으깨어 넣으면 금세 호박색으로 변한다. 손을 조몰락거릴수록 색이 점점 진해지는 걸 보면 즐겁다. 발효 마지막 단계에서 찐 단호박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돌돌 말아 부풀어 오르면 오븐에 구웠다.     


빵이 완성되었다. 단호박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서 한 조각을 썰었더니 진 청록의 껍질과 주황 단호박이 콕콕 박혔다. 처음에는 단호박으로 식빵을 두 번째는 파운드케이크를, 그리고 롤 빵까지 만들었다. 

    

밥 하기 싫은 날 이것만을 식탁에 올리고 싶다. 단호박을 두 개 정도 쪄서 두 세 조각씩 나눠주면 어떨까?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진다.  


뜨거운 날과 호박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궁합이 맞다. 다 먹으면 다시 챙겨 놓아야 할 것 같다. 그건 호박이 지닌 강점과도 연결되었다. 호박은 작지만 단단해서 오랫동안 밖에 두어도 괜찮다. 한여름 열기를 충분히 이겨낼 만큼 강하니 혹시나 상할까 염려할 일도 없다. 


큰 건 먹을 만큼 잘라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보관해 단단한 껍질은 호박 속을 확실하게 보호해 준다. 지금까지 이것을 사면서 겉은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지만, 안이 문제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처음부터 단호박에 애정이 갔던 건 아니다. 가끔 먹으면 맛있었다. 그것이 반복될수록 이제는 다른 생각 없이 좋아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쌓인 신뢰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여름날의 게으름을 호박은 허락해 준다는 것을. 내가 힘을 내어 무엇을 꼭 하지 않아도 전자레인지나 찜통에 쪄내면 요리 끝이다. 물론 이 행동조차 힘든 일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초승달 모양의 찐 호박을 금세 몇 조각 먹었다. 장마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눅눅함에 지친 날이면 호박을 먹으며 불편함을 보내야겠다. 김치냉장고 옆에 있는 호박 상자만 봐도 넉넉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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