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오는 걸까?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나는 건 금메달감이라는 자신감이 붙을 정도였는데 나이를 속일 수는 없나 보다. 예전 같으면 휴대전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겠지만 겨우 소리에 깨고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 대충 챙겨서 KTX에 올라탔다.
역에 들어서니 5시를 조금 넘긴 새벽이었지만 그곳은 이미 아침이었다. 서울로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잠을 청했다. 용산역에 내려서 다시 서울역으로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공항철도를 타고 마곡나루에서 내려 10분을 걸었다.
십여 년 전부 터 인연을 맺은 한의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이었다고 할 만큼 일에 파묻혀 살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어지럼증으로 인해 힘들어할 때다. 한 달 가까이 침을 맞고 한약을 먹으며 천천히 괜찮아졌다. 별말이 없으신 한의사 선생님은 침을 놓는 순간에는 수도자를 연상시켰다. 어떤 감각을 끌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몸 어디쯤과 내 상태를 확인한다.
그러다 처음 보는 듯한 굵은 침을 몸에 꽂았다. 처음에는 겁이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장해제 되었다. 잠이 스스로 찾아온다. 침을 맞으며 한 시간 가까이 지나면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때 느낌은 내 몸에 기록되었다. 평소와 다른 몸 상태가 계속되거나 힘들 때면 가끔 약을 지어서 먹었다. 시간이 허락될 때는 크게 맘먹고 가서 침 치료를 받았다. 한의원에 다녀온 지 이삼 년만이었다.
그동안은 한의원과 연결된 역에서 지하철을 내렸다. 이날은 한 역을 미리 내려걸으며 서울의 가을을 느꼈다. 보통은 아이들과 함께였는데 오늘은 남편이 옆에 있다.
먼 길을 달려온 건 나보다 남편 때문이었다. 지난여름에 그의 몸의 균형이 어긋나면서 정상적인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 더디다. 주말에 얘기를 나누다 한약을 먹기로 했다. 이왕에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은 이상 바빠도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좋을 것 같아 올라왔다.
남편과 번갈아 가며 상담을 받은 후에 침을 맞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심하게 놀랐던 일이 있었나 봐요.”
“네, 남편이 여름에 갑자기 아파서 그때요.”
순간 울컥해 왔다. 작은 물음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아주 간결하지만 큰 위로였다.
오랫동안 알아 온 상담 선생님을 만나 힘든 점을 나눈 후에 찾아오는 편안함 같은 거였다.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생생했다. 선생님이 침을 놓기 직전 그 한마디에 난 왜 눈물이 나올 만큼이었나. 선생님이 건넨 말은 애써 괜찮은 척했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마음의 무게였는지 모르겠다. 그 한마디는 바람에 힘없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보다 더 세게 내 가슴이 움직였다.
말의 힘을 떠올렸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현실로 끌어와서 더운 여름날 힘들었던 나를 만났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황한 말을 한다.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거나, 도움이 되는지도 모를 말들의 나열이다. 한편으론 적확한 표현이 좋은 말일까 하는 질문도 던진다.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는 순간에 마음으로 다가온 한마디를 듣는 건 행운의 날이다. 열흘이 지난 지금에도 한의원에서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