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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가운데 팥죽

달콤한 즐거움

by 오진미

함박눈이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정말 겨울인가 보다. 그동안은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계절이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이제야 겨울이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동지다. 이날은 팥죽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쉽다. 어릴 적 엄마는 귤 수확이 한창이던 이날에도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팥을 삶아두고는 저녁으로 죽을 솥 가득 끓였다. 그것 때문인지 습관처럼 이 날만되면 팥죽을 떠올린다.


지난 저녁에 남편에게 팥죽을 쒀주겠다고 말해 두었다. 다음날은 후회할 일을 종종 저지른다.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하는 적극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가끔은 이런 나를 만날 때마다 어색하다. 엄마가 살아가던 방식을 절로 배우게 된 걸까 하고 물음표를 던지다가도 답이 없다.


팥죽은 큰 마음먹어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저녁 시간에 뚝딱할 수도 없다. 아침에 팥을 한 시간 남짓 불려두었다. 끓는 물에 잠깐 두고 첫 물은 버린다. 그래야 팥의 떫은맛을 없앨 수 있다고 오래전 들었다.

팥죽과 새알심

다시 깨끗한 물을 넣고 대략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동안 삶았다. 팥을 몇 알 올려 손으로 만져보니 뭉그러질 만큼 부드럽다. 저녁 무렵에 새알심을 빚고 끓이는 일만 남았다. 남편과 아이들의 취향이 다르다. 전에는 모두가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당연하다 했지만 이젠 가능하면 각자의 의견을 들어주려 한다. 남편은 쌀이 들어간 팥죽에 새알심 몇 알을 넣고, 아이들은 오롯이 새알심만 들어간 것으로 했다. 아이들은 설탕을 원하는 만큼 뿌려서 먹는다. 남편은 먹기 직전 소금으로 간했다.


냉동실에는 떡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 둔 찹쌀가루가 있다. 그것을 꺼내어 충분히 녹이고는 미지근한 물을 넣고 반죽했다. 남편이 새알심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늦은 오후 무렵부터 상황을 보니 귀찮은 모양이다. 내가 해도 금세 할 것을 뭐라 하기도 싫다. 흰 가루를 만지는 건 나름대로 힐링이다. 힘을 줄수록 가루가 덩어리 진다. 말랑한 그것을 손바닥에 두고 원하는 대로 굴리면 예쁜 새알심이 나온다.


블렌더로 팥을 충분히 간 다음 생수를 섞어주었다. 뻑뻑한 팥물보다 적당히 묽어야 제맛이다. 팥물 온도가 올라가면 새알심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기 시작한다. 새알심이 익으며 위로 떠오른다고 하는데 그럴 기미가 없다. 단지 내 느낌만을 믿고 불을 껐다. 찹쌀은 워낙 불에 빨리 반응하기에 충분히 익었다.


갓 한 김장김치에 팥죽을 먹었다. 동지는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긴 날이다. 팥죽을 먹으며 겨울을 내 속도로 보내기 위한 마음을 다잡는다. 매일 의식하지 않으면 긴 날들이 그냥 지나버린다. 원하는 하루가 무엇이든 그것을 자세히 그려보고 천천히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림책 이야기처럼 갑자기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마법은 현실에선 없다.


문득 팥죽이 먹고 싶다고 해서 한 그릇을 내놓을 수 없다. 휴대전화를 들어 배달앱을 열고 주문하면 몇 분 내로 도착한다. 그렇게 만난 팥죽은 내 것이 아니다. 비록 감탄할 맛은 아닐지라도 팥을 꺼내 쭉정이를 골라내고 붉은팥이 검게 변해가는 현장을 만난다면 오래 기억되는 일상으로 저장된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나를 거쳐가는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맛에 덧입혀진 음식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배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터득하게 되는 부엌 공부다.


엄마의 부지런함이 키운 팥은 여름을 생각할 어느 늦은 봄날에 파종하고 가을에 거둬들여서 내게로 왔다.

"움직이지 않아도 생기는 건 없어. 이것도 엄마가 열심히 일 하니까 먹는 거야."

엄마는 무언가를 건넬 때마다 짧은 말로 자신의 노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렸다. 매번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예사말처럼 들리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팥죽 한 그릇을 통해서도 난 엄마와 연결되었다. 이런 묘한 감정이 들 때는 마음 흐트러지지 않게 중심을 잡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팥죽 먹는 이때가 돌아오면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올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가슴 한쪽은 고요히 두려고 애쓴다.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예상에 없던 많은 일이 지났고 어떤 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팥죽을 한 숟가락 뜨면서 힘들었던 날들은 진한 팥 속으로 묻어두었다. 그다음은 달콤한 팥물과 살며시 다가오는 새알심을 맛보며 모든 게 괜찮다고 흘려보낸다.


팥죽을 먹으며 겨울을 잘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너무 팥죽이 먹고 싶어 마트에서 한 봉지를 샀는데 내 바람과는 전혀 다른 맛이어서 실망했다. 내 마음이 가지 않은 건 딱딱한 팥이 물렁물렁해지는 시간 동안 함께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과정을 같이 하는 건 사랑을 만들고, 세상을 보는 세심한 시선이 내 안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폴폴 끊는 팥죽을 그릇에 담아 겨울을 잘 보내자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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