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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an 07. 2021

새해 첫날 찐빵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디를 돌다 왔을까. 그냥 집에서 머물렀지만 마음은 얼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이제는 깨어야 하지 않을까. 매일 수 번 내게 말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건 ‘내일부터’였다. 우선 몸부터 조금은 부지런해지기로 했다. 움직여야  살아나게 되고 살아갈 수 있는 듯했다.    


“우리 내일 찐빵 만들까?

큰아이에게 물었다.

”응 엄마 좋지. 팥이랑 우유홍차잼 넣어서요. “

그렇게 아이와 약속했다. 2020년을 몇 시간 남겨놓지 않은 31일 아침부터 팥을 씻고 삶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두려워질 즈음이었다. 밖은 이틀 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꽤 쌓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겨울날이었다. 한 시간 정도 냄비가 보글보글 하더니 숟가락을 들어 팥을 먹어봤다. 조금 설겅여도 익고 있다. 아이들이 달콤한 맛을 원했기에 설탕을 넣었다. 생각보다 충분히 넣었다. 우울한 기분을 순간 날려줄 때는 단 맛이 제격이다. 팥이 설탕을 만나니 빛깔이 곱다.     

이제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면 다 된 일이었다. 마음속 상념들이 훼방을 놓는다. 미루고 싶다. 길 것처럼 느껴졌던 하루는 오후로 달려간다. 편하게 널브러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이거 꼭 오늘 해야 할까?”

“음 엄마 아니야. 나도 오늘은 좀 그러네.”

혼자 결정하기 어려웠을까? 누군가의 동의를 구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습성 탓이다. 투명 그릇에 들어간 팥은 냉장고로 직행했다. 하루가 지났다.     


새해다. 31일 날 저녁을 먹고 몇 시간 잠을 청하니 맞이한 아침일 뿐인데 새 달력이 얼굴을 내밀었다.  2021년. 아침은 떡국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정성 들인 아침이다. 생선과 애호박으로 전을 만들고 잡채까지 했다. 그동안 어디 꼭꼭 숨어있던 열정이 살아났는지 신통할 따름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아침을 먹고 나니 그리 할 일이 없다. 애들도 심심한 눈치다. 빵을 만들어야겠다. 남편은 언제나 그러하듯 티브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들과 손을 모아서 팥을 넣거나 우유홍차잼을 넣고 예쁘게 또는 되는대로 모양을 만들었다. 열 개를 만들 즈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빨리 끝내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아침 일찍부터 몸을 움직임 까닭에 피곤함이 밀려온다. 침대에 눕고 싶다. 아이들은 오랜만이라 재밌게 손을 바지런히 움직인다.     


역시 손을 모으니 40여분의 지날 즈음 끝이 보인다. 이제 찜통에서 쪄내는 일만 남았다. 이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시간이다. 세 번 정도 찜통을 비우며 한 시간 반을 불 앞에서 보초를 섰다. 이제야 정말 완성되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빵을 하나 베어 물었다. 달콤한 팥과 담백함이 좋다. 아이들은 맛보다도 뿌듯함이 먼저 밀려오는 듯하다. 언제나 시간이 지나면 귀해지는 법이다. 나중을 위해서 통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빵을 빼곡히 담아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매일 집에서 지내는 요즘 문득 생각나는 날이면 반가운 손님처럼 입안을 행복하게 할 보물이다.  


찐빵이 내게 특별한 건 어렸을 적 기억의 한 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제삿날이면 종종 친척들이 모여 찐빵을 만들었다. 70~80년대만 해도 특별히 먹을 게 없었다. 친척들이 한데 모이는 날이기에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들었다. 중력분 밀가루를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생이스트나 막걸리를 넣고 반죽한 다음, 따듯한 아랫목에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부풀도록 둔다. 돌 지난 아기 볼이 엄마 젖으로 빵빵하게 부푼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다. 어른들은  노련한 손놀림으로 빵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큰 솥에 불을 때고 쪄내면 소쿠리 한가득 뽀얀 얼굴이 탱탱한 빵들이 가득 모이게 된다. 그때는 12시가 돼야 제를 지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그 빵을 나누었다. 언제나 바쁘게 지내는 시골의 삶이었기에 과수원에서 혹은 아이들에게 한때 중요한 간식이 되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친정에 내려갈 때마다 꼭 들리는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이나 동문시장에서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빵을 만난다.    

 

쟁반이며 접시, 반죽했던 양푼이에 하얀 밀가루가 찐빵의 흔적을 말해준다.  정신없이 설거지를 한 다음 한숨을 돌렸다. 몸을 움직이니 여러 생각이 떠다니다 멈췄다. 생각도 없다. 마음속 감정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다. 몇 시간째 내 몸을 감싸주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싱크대에서 냉장고로 향하는 몇 걸음 안 되는 찰나에 한 가지가 스친다. 어떤 일을 하는데 언제나 그러하지만 준비하고 기대하는 과정이 제일 좋다. 정신을 차려 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문득 떠오른 찐빵 만들기에 즉흥곡을 연주하듯 밀어붙였다. 가장 좋을 때를 기다리며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곳을 향해서 열심히, 때로는 맹렬히 숨을 쉬지도 않고 달린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대했던 무엇이 나를 채워주었을까? 그동안의 경험치를 살펴보면 부족감, 허탈함, 피로감이 밀려올 때가 많았다. 결론은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무엇에 홀린 것처럼 마음에서 들려왔다. 내가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지금도 몇 발짝 걸어가 돌아보면 ‘좋은 날’이었다.     

새해 첫날 빵을 만들었다. 하루를 미루고서야 가능했던 일이 막을 내렸다. 아이들은 참새가 재잘대듯 종알거리며 부드러운 반죽을 조물조물했다. 어떤 건 팥이 삐져나오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만이 없다. 함께 만드는 동안 새해 첫날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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