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아버지가 그리운 이유

나를 키운 섬, 그 풍경들

by 오진미


비행기를 타고 30여 분이 지났다. 한라산이 멀리 눈에 들어온다. 제주만의 빛깔로 출렁이는 푸른 바다는 잊고 있던 성장일기를 꺼내놓게 한다. 2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중학교 무렵부터였다. 어느 곳도 자유롭게 갈 수 없다는 단절감이 섬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부추겼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는 운동장 청소시간에 파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고 고향은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면서도 아린 특별한 공간이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스친다.


여름이었다. 과수원 농약 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계절이다. 라디오에서 새벽부터 알려주는 기상예보를 누구보다 열심히 들었다. 마치 신이 들려주는 정보인 것처럼 믿었다. 전날부터 통에 물을 받는다. 지금처럼 기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때라 큰 고무통에 물을 준비했다. 모자랄까 정확한 계산과 함께 여분의 것도 준비하고 기계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혹여나 고장이라도 나면 전체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뜨거운 태양은 언제나 일하는 농부를 힘들게 했다. 하루 종일 농약을 치는 것은 큰 무리다. 해뜨기 전 이른 시간과 저녁 무렵이 무더위를 피해서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이런 이유로 소위 말하는 원스톱으로 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일주일 혹은 2주 단위로 찾아오는 농약 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섰다. 워낙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언제나 지쳐있던 아버지다. 강철 체력이 아니었던지라 무리를 하게 되면 꼭 몸에서 신호를 보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관절염을 앓았다. 몸으로 움직이는 과수원 농사와 하우스를 함께 하니 쉰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더운 날 이게 뭐니 집에서 정리도 안 하고,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든 해야지. 아버지는 항상 잠자기 전에 천정을 보면서 내일은 무얼 하고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생각한다.”

그냥 멍하니 걷거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금기처럼 여겼다. 생각하는 일은 한편으론 정신적인 노동이다.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한참이나 그렇게 사셨으니 하루가 긴장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부지런한 딸이었다. 종종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던 여름이면 새벽 다섯 시가 되기 전 경운기를 타고 과수원으로 갔다. 호스를 가지런히 놓아 농약이 잘 흐르도록 했다. 아버지가 여러 가지 약의 무게를 달고 통에 풀어 넣는다. 때로는 허니 머스터드 같은 빛깔을 내는 농약을 바라보면 묘한 기분이다. 찐득하고 달콤한 무엇을 떠올리다가도 어느새 올라오는 독한 향에 고개를 흔들게 된다. 서늘했던 아침 기운이 점차 사라진다. 매미가 울고 얼굴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힌다. 경운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과수원 숲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살핀다. 옷은 어느새 흙 범벅이다. 갯벌에서 낙지잡이에 나선 사람 같다. 저 멀리서 아버지가 농약이 잔뜩 묻은 비옷을 입고 달려온다.

“기계가 막힌 것 같다. 저기 가서 연장 갖고 와라.”

“아니 그것 말고 조이는 거 있잖아.”

아버지 목소리가 예민해졌다. 혼날까 부랴부랴 창고로 뛰어갔다.

공업사 기술자 아저씨처럼 아버지가 펜치와 나뒹구는 철사로 터져버린 호스를 단단히 조이고 깨끗이 씻는다. 다시 탕탕탕 농약이 시작됐다. 그러기를 2시간 반이 지났다. 주변이 온통 농약 냄새다. 귤나무들은 무슨 바나나우유 폭탄을 맞은 듯 노란빛이다.

“일은 요령이 있어야지. 옷이 그게 뭐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지 우선 그려보고 하는 게 중요하단다.”

언제나 넋이 나갈 정도로 열심히 뛰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나를 위한 아버지의 따끔한 충고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싸운 군인보다 작전본부에서 이들을 지원한 군인이 힘이 빠져 버린 꼴이다. 그때는 언제나 이렇게 무엇이든지 조언하고 평가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착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밭으로 왔건만 돌아오는 건 내 부족함을 나무라는 일이었다. 입이 댓 발이나 나오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깜짝 제안을 한다.

“오늘 일도 다 했으니 남원 바다에나 가자. 바닷물에 수영도 하고 보말도 잡자꾸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중산간 마을에 살았던 우리는 바닷가에 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있어 10분 이내로 갈 곳이었지만 편리한 이동수단이 없었다.여름에 고작 두세 번 짠물에 몸을 담그는 게 전부였다. 덜커덩거리는 경운기에 올라탔다. 오빠는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준비했다. 수건과 마실 물 만 챙겼다. 지금처럼 치킨이나 수박 참외 등 과일을 챙기기는 꿈같은 일이었다. 바다에는 검은색 바위가 지천이다. 변변한 여름 신발이 없던 시절이라 돌의 따끔따끔한 느낌을 몸으로 느끼며 바닷가로 향했다. 태양은 어제보다 얼마나 더 뜨거운지 내기하는 듯 따갑다.

“진미야 여기서 한번 수영을 해 봐라. 아버지 하는 거 보고 알았지. 수영할 줄 알아야 해.”

아버지가 먼저 시범을 보인다. 철썩 파도가 다가와 부딪히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아무리 얕고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덜컥 겁이 났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는 보말 잡이에 나섰다. 돌을 들어보니 거북손이며 작은 게, 보말과 해초들이 가득하다. 소쿠리에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담았다. 아버지는 바닷물이 신경통에 좋다며 한참이나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 오빠는 고전을 거듭하더니 어랭이 한 마리를 잡았다. 흥분상태다. 두 세 시간 바닷가에서 놀았다. 다신 경운기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한다.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은 소박한 시골의 여름 피서였다.


어른이 되어 여름이면 단골인 왁자지껄 요란한 휴가 이야기를 외면하게 된다. 부산 해운대에 얼마의 사람들이 모였느니, 고속도로에는 강원도로 향하는 차가 몇 시간째 꼼짝 못 하고 있다고 난리다. 그때마다 멍해진다. 시골에서 살았기에 피서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없어서일까.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 별을 보거나 부모님을 따라 밭에 갔던 기억뿐이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외면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말을 생생한 목소리로 다시 듣고 싶다.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사랑의 언어였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 4남매를 키워야 했던 가장으로, 세상과 싸우며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야 했던 여정이었다.

한편으로 한없이 다정했던 아버지였다.

“다 살아진다.”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다. 누군가는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고 했다. 내겐 아버지가 그렇다.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10대와 20대의 내 삶은 그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잘 살아야 돼, 말로만 말고 진짜 잘 살아야 한다.”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때 아버지가 남겼던 마지막 말이다. 살아가는 일이 정말 어렵다. 예상치 못한 벽 앞에서 두려울 따름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어느날 호탕한 미소를 보이던 아버지를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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